장 보는 일상 속에서 발견한, 캐나다의 음식 나눔 문화
슈퍼스토아에서 장을 보고 계산대를 빠져나오려던 오늘, 출구 앞에 놓인 큼지막한 상자가 다시 시선을 붙잡았다. 『FOOD BANK』라고 적힌 글자 아래에는 손님들이 기부한 통조림, 시리얼, 파스타 상자, 캔디, 주스팩, 베이비 푸드까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새로운 나눔의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매년 연말이 다가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연말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부터 바빠지고 덩달아 상자도 함께 더 빨리 채워진다. 겨울은 춥지만, 정작 마음이 먼저 따뜻해지는 기부자들이 많다. 한 끼 해결이 어려운 노년,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생계를 잃은 가정, 거기에다 홈리스까지 적지 않다. 그래서인지 이 상자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잠시 멈춰 자신이 산 식품 하나를 꺼내어 조용히 넣고 간다.
한국의 구독자 분들은 ‘기부’ 하면 흔히 돈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캐나다의 푸드뱅크라는 이색적인 기부 방식은 오래전부터 자리 잡아온 문화다. 이곳의 푸드뱅크는 돈이 아닌 오로지 식품만을 받는다. 이러한 방식이 유지되는 데에는 캐나다가 안고 있는 사회적 고민이 깔려 있다. 정부가 홈리스나 취약계층에게 매달 일정 금액을 지원하더라도, 그 돈이 반드시 생계나 식사로 연결되는 구조가 아니다. 지원금이 자칫 마약 구매 등 다른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우려를 미연에 줄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지역사회는 보다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도움이 닿도록 ‘먹을 것’을 건네는 방식을 선택했다.
“먹을 수 있는 것”을 바로 건네는 방식.이것이 캐나다 푸드뱅크 문화의 핵심이다.
상자에 들어가는 것은 작은 시리얼 한 박스일 수도 있고, 몇 달러 안 되는 간단한 식품일 때도 있다. 하지만 금액과 양보다는 마음이 우선하기에 오랜 문화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는지 모른다. 기부자도 받는 사람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어,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경험이 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그 작은 박스 하나가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식품 기부는 돈보다 더 귀하고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먹을 것을 나누는 행위에는 ‘함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부족함을 안고 살아가지만, 오늘 마트 출구 앞에 놓인 그 작은 상자를 보며 깨달았다. 누군가의 작은 정성이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를 조용히 버티게 해주는 따뜻한 세상이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푸드뱅크 상자를 지나 오늘의 장보기를 이어가기 위해 위너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료품 대신 의류와 선물용 상품들이 진열된, 또 다른 분위기의 매장이다. 평일인데도 쇼핑몰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사람들로 붐볐다. 아직 크리스마스까지 한 달이 넘게 남았지만, 사람들의 걸음은 이미 바빠져 있었다. 우리 부부도 괜스레 마음이 분주해진 느낌으로 매장을 둘러보았다. 아내와 나는 각자 필요한 물건을 직접 고르고, 서로에게 주는 선물로 인정해 주기로 하며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간단히 마무리했다. 사실 선물을 고르는 일이 가장 어렵다. 상대의 취향은 알고 있지만, 어떤 것을 선물해야 좋을지 늘 망설이게 되고 정확히 파악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먹는 선물’은 다르다. 누구에게나 큰 부담 없이 건넬 수 있고, 대부분 좋아할 만한 실용적인 선물이다. 취향을 맞추는 고민보다 정성이 먼저 떠오르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장을 보다가도 자연스럽게 나눔에 참여한다. 작은 식품 하나가 누군가의 식탁 한 끼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캐나다 곳곳에서 이런 움직임이 더 활발해지고 있다.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하는 손길들. 이 작은 실천 덕분에 캐나다의 겨울은 조금 덜 차갑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