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남편 이발사가 된 날, 염색으로 되찾은 젊음
몇 달 전부터 아내가 전용 이발사가 되어주었다. 처음에는 아내에게 머리를 맡긴다는 것이 솔직히 불안했다. 가위질이 서툴러 한동안은 ‘쥐 파먹은 머리 모양도 그냥 즐겼다. 하지만 예약 시간 맞춰 이발소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이 있어 좋았다. 어느새 아내가 정성 들여 머리를 다듬어 주는 시간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아내표 이발’에 익숙해졌다.
오늘도 욕실 욕조 앞에 수건을 깔고 접이식 등산 의자를 펴고 앉았다. 어느덧 손에 익은 듯한 아내의 가위와 이발기계(건전지용 이발기) 소리가 욕실에 정교하게 들린다. 몇 달 사이 아내의 손길이 한결 부드러워졌다는 걸 느끼며,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머리를 다 자른 뒤 욕실 양쪽 거울을 이용해 머리 뒷부분(후두부)을 확인했다. 예전처럼 삐뚤어진 느낌은 없었지만, 반짝 비어 보이는 부분이 있어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본다. 아내는 “흰머리와 검은 머리가 섞여서 그렇다고 실제로는 괜찮아요”라며 웃는다.
얼마 전부터 염색을 멈추고 자연 그대로 두었더니, 반백인지 알았던 머리색은 언제부턴가 80% 가까이가 흰머리가 되었다. 처음엔 나름 자연스러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흰머리가 늘어나면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아들은 흰머리를 보고 “아빠 멋있어요. 중후해 보여서 좋아요”라며 흰머리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가져왔다. 아내도 자연스러운 지금의 모습이 좋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백세 시대에 욕심인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40년을 넘게 살아야 한다는 계산을 하고 보니, 지금부터 완전히 흰머리로 지내기엔 시간이 많이 남아 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오늘, 아내와 함께 마트에 들러 다시 염색약을 고르기로 했다.
마트에는 여러 종류의 검은색 염색약이 진열되어 있었다. 사실 예전에는 무심코 순전히 블랙인지 알고 샀는데 염색 후 머리가 푸른빛을 띠는 바람에 며칠 동안 난감했던 기억도 있다. 알고 보니 black blue를 샀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자연스러운 색을 찾으려고 라벨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폈다. 결국 NATURAL BLACK이라는 문구가 적힌 제품을 골랐다.
집에 와서 욕실 양쪽 거울을 이용해 직접 염색을 했다. 이번에는 아내의 도움 없이 스스로 염색을 해보았다. 염색약을 씻어내고 거울 앞에 서자, 한순간에 까맣게 변한 머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몇 달간 흰머리만 보아온 탓인지, 포토샵으로 덧입힌 머리 같은 인위적인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니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검정 머리 덕분인지 표정이 한결 생기 있어 보인다는 아내의 말이 기분 좋았다. 스스로를 가꾸는 일은 나이를 떠나 삶에 활력을 준다는 사실을 다시 느낀 순간이었다.
앞으로는 지나치지 않은 선에서 염색을 이어가 볼 생각이다. 어느 날 검정 머리가 내 나이와 더 이상 어울리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오면, 그때는 기꺼이 자연스러운 흰머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젊음을 지키려는 마음이 욕심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오늘, 아내의 손길과 스스로 한 염색 덕분에 오랜만에 ‘조금 더 젊어진 나’를 마주했다. 앞으로 남은 긴 시간 동안, 이렇게 작은 변화라도 내 삶을 가꾸는 힘이 되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