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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도 이어가는 오늘 우리 집 김장김치 담그는 날

해외에서 아들·며느리와 함께 담근 김장 김치의 정(情)

by 김종섭

해외에 살면서 작은 양이지만 김장을 하게 될 줄은 예전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오늘 김장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 11월의 마지막날인 오늘, 우리는 작은 아들 내외와 함께 김장을 마쳤다. 예전처럼 한국에서 살 때 수십 포기에서 심지어는 수백 포기까지 동네 사람들과 품앗이하던 시절은 아니지만, 여전히 김장이라고 이름 짓은 오늘은 ‘한 해의 농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하루였다.

과거 직접 농사지은 배추로 김장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김장김치 재료 전부를 따로 살 필요가 없었고, 밭에서 거둬온 배추만으로도 풍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쌀농사도 그렇지만 배추농사가 잘되지 않은 해는 왠지 일 년 농사를 망쳤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시대였다. 오늘은 그때에 비할 수 없지만, 배추 한 박스(7 포기)와 무 15kg을 세일가로 한인마트에서 사 와 김장김치를 담갔다. 어쩌면 담그는 양이 적어 김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무늬만 김장김치 담그는 날일 수도 있지만, 우리 집에서는 충분히 김장김치 담그는 날이라 할 만하다. 배추 17불(17,000원), 무 20불(20,000원). 요즘 물가에 비하면 참 고마운 가격이었다.

전날부터 아내와 나는 배추와 무 이외에 쪽파, 마늘, 새우젓, 생강, 갓 등 필요한 재료를 마트에서 사 와 손질하느라 부산했다. 오늘 오전 김치를 담그기 위해 늦은 밤 배추를 미리 절여 두었다. 며칠 전에는 작은 아들이 전화를 걸어와 “김치 담그는 날 같이 하고 싶다”며 날짜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 덕분에 일요일 휴일을 담그는 날로 정하게 되었다. 아들 내외가 김치 담그는 일을 함께하겠다는 말이 고마워 아내와 나는 준비하는 손길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다음날 아들 부부가 오기 전, 무 다듬고 채 써는 일은 내가 맡았다. 아내는 예전에 채칼에 여러 번 손을 다친 트라우마가 있어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예정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아들 내외와 함께 본격적으로 김장이 시작됐다.

무는 양이 많아 네 개 정도는 신문지에 싸서 보관하고, 나머지는 채를 썰어 배추김치 양념에 버무렸다. 별도로 깍두기도 만들었다.

사실 아들 내외의 ‘일손’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그저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김장은 생소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김치보다는 인스턴트식품이나 이미 만들어진 밀키트에 익숙한 맛을 즐기는 세대다. 특히 해외에서는 김치가 식탁의 필수 음식에서 한동안 멀어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며느리가 김치 담그는 일에 익숙하지 않을까 싶어 시아버지가 시어머니 역할을 대신해서 이것저것 건네주며 도움을 요청했다.

아내는 “우리가 그냥 하자”고 했지만, 나는 며느리도 함께해 김치 담그는 우리 전통음식의 정서를 조금은 느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치가 요즘 세대의 식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었다고 해도, 김장이라는 문화만큼은 계속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김장이 끝난 뒤 김장김치에 사용되었던 용기를 깨끗하게 닦는 건 작은 아들이 맡았다. 그릇 중에는 고무로 된 오래된 대야(고무대야)가 있다. 한국에서 이민 올 때 가져온 것인데, 아들은 이 대야가 신기했던지 언제 샀는지, 얼마 정도였는지 물어보았다. 이런 오래된 생활용기가 요즘 세대에게는 하나의 '옛 물건'처럼 보인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는 남녀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가사를 함께한다. 아들 둘이 집에 오면 며느리가 있음에도 아들들이 설거지를 도맡아 하는 모습을 종종 보아 왔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예전에는 주방이 여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시절도 있었기에, 이런 변화가 새삼 고맙고 흐뭇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랜 시간 김장을 마치고 우리는 늦은 점심으로 김치 보쌈을 준비해 함께 먹었다. 김장 뒤 보쌈은 거의 공식처럼 따라붙는 음식이다. 식사를 마치고 아내는 김치 말고도 이것저것 챙겨 작은 아들 내외에게 건네주느라 짐을 싸느라 분주했다. 큰아들은 한국에, 작은 아들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 자주 챙겨줄 수 있는 작은 아들 부부에게 신경을 더 쓰는 모습에 문득 부모님 생각과 누님 생각까지 떠올랐다. 이번 김장김치 재료로 사용한 고춧가루는 누님이 직접 농사지어 작년 한국 방문 때 싸 주신 고춧가루이기 때문이다.

옛날 이민 초기에는 김치와 고추장은 여전히 해외 여행자들에게는 필수품이었고, 이민자들에게도 한국 식재료는 한국에서 직접 가져오지 않으면 현지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품들이었다. 시간이 지나 한인마트가 생기고, 지금은 한국 못지않은 식재료를 언제든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고향 음식에 대한 향수도 많이 옅어졌다.

오늘 냉장고에 김장김치가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부자가 된 기분이다. 김장을 일 년 농사에 비유한 이유를 새삼 깨닫는다. 해외에서 가족과 함께 담근 오늘의 김장김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주는 우리의 문화이자 집 안에서 작은 축제처럼 치러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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