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막걸리 한잔 마시고 가세요

기억의 창문을 열면 추억의 잔이 흐른다

by 김종섭

농촌 생활을 들여다보면 강한 햇살이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 날씨에도 여유를 부릴 만큼 한가롭지 못했다. 논밭의 곡식은 날씨에 구애됨 없이 항상 농부의 손길을 기다렸고, 땡볕엔 고작 밀짚모자 하나로 태양을 가려가는 일이 전부였다. 무더운 날씨에 촌부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고 하루가 길게만 느껴졌다. 갈증의 고통은 시원한 물 한 모음보다 시큼 달콤한 막걸리가 우선이고 싶은 아버지의 막걸리의 사랑이 있었다. 논 밭 일을 하실 때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미 읽고 계셨다. 밭에서 갓 얻어낸 풋고추와 집에서 가져온 고추장으로 소박한 안주거리 만드셨고, 시원한 막걸리를 어머니는 준비하셨다.


아버지는 유난히도 막걸리를 좋아하셨다, 하루 일과를 떠나보내고 어스름 해질 무렵 아버지는 주전자 하나를 내 손에 용돈과 함께 쥐어 주셨다. 구부러진 언덕길을 돌아 내려가다 보면 올망졸망 모여 사는 자그마한 이웃 동네를 만나게 된다. 허름한 첫 번째 집이 막걸리를 사러 온 구멍가게이다. 가게 입구는 오랜 시간 동안 손님의 발길을 외면한 듯 무성한 잡초가 앞마당에 수북하다.


가게 문을 연신 두드려봐도 인기척이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낡은 문틀 사이로 삐꺼덕 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움으로 밀려든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머리를 삐죽 들이밀었다. 가게 바닥은 굳게 다져진 황토 흙으로 세월을 묵묵히 지켜낸 흔적이 눈에 비쳤다.

"아줌마 계세요"

목청껏 몇 번을 불렀을까,

아주머니는 뒤늦게 부엌을 황급히 빠져나오시면서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시기에 바쁘셨다.

방금 저녁 설거지를 끝낸 듯했다.


"뭘 줄까"

"저기 있는 막걸리 한 주전자만 주세요"

바닥 밑으로 깊게 묻어 둔 술 독(항아리)이가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는 순간이다. 독은 마치 오래된 마을의 유물과도 같아 보였다. 독을 덮고 있던 대발을 거둬 내고 준비해두었던 기다란 막대를 이용해서 한참 동안을 독 안 막걸리를 휘젓기 시작했다. 이윽고 막걸리 냄새가 가게 안을 진동해 나가기 시작했다. 주인아주머니는 부지런히 준비된 주전자에 하나 가득 넘쳐나게 막걸리를 담아내셨다. 잠시 후 방 안에서 수년 전부터 빼곡히 써 내려온 듯한 낡고 낡아 버린 외상장부를 들고 나오셨다.

주전자 속에 시골 인심이 가득 차 있는 탓일까, 조심스럽게 들고 가고는 있지만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가 요동치는 것은 더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순간, 주전자 주둥이에서 밀려 나오는 막걸리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부터 막걸리 맛을 느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막걸리를 마시고 취기에 흥겨워하셨던 감정까지는 읽어내지 못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파전에 동동주가 추억을 소환한다. 아버지는 비가 오는 날에는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으셨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파전을 부쳐 내셨고 나는 그날도 비를 맞으며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 심부름을 했던 기억이 가득하다. 그땐 사실 잦은 술 심부름이 죽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싫었다. 늘 심부름은 막내인 내 몫으로 돌아왔다. 한때는 막내의 환상을 깨고 싶었다.


막걸리는 농부의 대표적인 술로 사랑을 받아 왔지만, 국민의 술은 되지 못했다. 도심에 대부분의 사람은 막걸리가 아닌 소주나 맥주 심지어는 양주로 대신했다. 막걸리는 포만감이 쉽게 느껴왔고 유쾌하지 않은 트림과 함께 취기가 오래가고 개운치 않게 머리가 아파오는 후유증이 남아 갔기 때문이다.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동동주에 파전을 생각해 지만, 예전 들녘의 풍경 속에 마시던 막걸리는 도심의 콘크리트 벽을 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빗줄기가 굵어져 가고 거세지기 시작했다. 비는 바닥의 부딪침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월의 간격을 흘려보냈다. 슈퍼에서 막걸리 한통을 사들고 들어 왔다. 번거로운 파전 대신 냉장고 안에 먹을 만한 안주를 찾아냈다. 비 오는 날 막걸리에 파전이라는 막연한 정취보다는 내 아버지가 마셔갔던 막걸리에 대한 기억이 추억 한편으로 강하게 밀려들어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추억의 막걸리 한잔 마시고 가세요"


뜨겁게 달구었던 한낮의 움직임 속으로 설익은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온다. 아!! 가을이다,


'어느 늦은 여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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