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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김 Jan 05. 2024

채우기 위해_비우기

보람중독 & 과부하 | 내딸 집단따돌림 극복기, 일곱

보람은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 성취감을 쫓아다녔다.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였고 왜 그렇게까지 보람을 찾겠답시고 오랜 시간을 헤매고 다녔는지. 고등학교까지는 평범했다. 숙제 성적 공부 친구 열심히 미션 완수하느라 뭐든 하면서 '보람'찬 시기였다.


가톨릭계 마산성지여고, 고2부터 기숙사에 살았다. 수녀님이 사감인 기숙사 독서실 책상에서 일어난 아침이 참 많다. 공부하느라 밤새웠다? 아니다. 밤에 학교 야자를 10시에 끝내고 돌아와서 숙제인지 무엇인지 하느라 앉아서 잠들면 그대로 아침까지 내리 잤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룸메이트들에게 왜 날 안 깨웠냐고 힐난했지만 '네가 무섭게 건들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깨우냐'라고 '이제 사감수녀님도 포기했다'는 둥. 그땐 그랬다.


나는 기억도 안 나는데, 잠 덜 깬 나는 방으로 가라고 깨워준 착한 친구들에게 화나 냈으니, 지금 돌아보니 웃긴 추억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가위눌린 기억이 많다. 나뿐만 아니라 몇몇 룸메들도 그랬다. 거기에 귀신이라도 있었을까? 아니, 생각해 보면 수능을 앞둔 그때 함께 엄청 많은 추억을 쌓기도 했지만 학교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언덕보다 더 높은 스트레스는 늘 함께였다.   


출처: 핀터레스트. 찾다 찾다 찾은 가장 가위눌림을 잘 표현한 그림들이다.


그러니까 다시 돌아와서 내 보람 중독은, 결혼과 출산 후에 직장을 그만두고 중국에 있었을 때다. 남편을 따라왔지만 독학하던 중국어를 계속 이어할 생각에 처음엔 신났다. 몇 년 후,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소속감이 사라진다니, 불안감은 치솟았다. 소속감, 보람이나 성취에 대한 목마름인지. 보람중독자인 내게 엄마로만 의지할 곳 없는 타국 생활은 공포였고 그 구멍이 메워지지 않았다. 뚜렷한 목표를 상실했다고 느꼈다.


그냥 그때 내딸을 더 찬찬히 바라보고 안아주고 함께 사는 것에만 집중해도 충분했을 텐데...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거나 무엇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국 그 모든 보람을 찾아다닌 지난 10년이 그렇게 엄청난 성취로 결론지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 헛된 것은 쫓을 필요가 없다. 보람과 성취는 건강하게 지낸 오늘 하루 속에 있었다. 이 자명한 진리를 나는 긴 시간 깨닫지 못했다. 머릿속을 꽉 채운 보람중독과 과부하된 뇌가 내 눈을 멀게 했다.


빈둥거리며 아무것도 안 한 하루가 언제였더라. 내 하루는 짧다. 짧다고 느꼈다. 그래서 짧은 하루를 길게 살려면 남들도 다 한다는 '미라클 모닝'을 실천해야 하는데, 7시간을 못 자면 하루를 살 수 없는 저질체력으로 태어났다. 나에게는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보람중독과 멀티태스킹


멀티태스킹은 과연 장점일까? 직무 내용 필요조건에 백이면 백 들어가 있다. 회사에서 직장인이 멀티가 되지 않으면 할 일 목록은 줄지 않는다. 효율적인 업무 수행에 필수. 그 습관이 일상에도 스며들었다. 밥 하면서 유튜브보기. 뛰면서 드라마 보기. 놀면서 노래 듣기. 걸으며 오디오북 듣기.


꼭 직장 탓 안 해도, 온전히 하나에만 집중할 수 없다. 여러 가지를 한 번에, 바쁜 척 사는 삶에 중독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래를 듣다가도 집중을 못한다. 이 노래는 내 취향인가? 그럼 하트를 눌러야 하고 내 음악 서랍에 저장해야 한다. 그냥 즐기면 되는데. 이건 습관인가 타고난 건가. 여러 개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노트북과 휴대폰이 우리 손에 들어온 후에 더해졌다.


과부하와 건망증


멀티태스킹이 습관화된 뇌는 과부하를 일으키고 건망증이 딸려 오기 마련. 여러 일을 한 번에 하는 버릇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짬뽕이 된다. 할 일을 놓치거나 중요한 일을 까먹기도 한다.


이번 따돌림 사고가 일어난 후 나에게 과부하가 왔다. 단순한 일을 처리하기 힘들었다. 북받치는 감정과 해야 할 거리들은 벅찼다. 학폭위 장학사와 몇 번의 통화를 했던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엄마인 장학사의 공감과 도움 되고픈 마음은 감사했지만 하나마나한 결정과 조치를 위한 시간들. 학교 폭력이 인정됨, 이라는 문구가 종이 한 장에 새겨지기까지...


어쨌든, 그와 동시에 실업급여를 받기 시작한 덕분에 처음 두 달은 비워보자고 맘먹었다. 이젠 빈둥거리며 생각을 비우고 명상을 해야 하지 않나. 그렇다고 약 한 달 반이 지난 지금, 제대로 빈둥거리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기 근처에도 가질 못했다.


하루 걸러, 혹은 매일같이 딸이 좋아하는 간식을 넣어주러 병동을 다녀오기. 건강 챙기려고 헬스장 출근도장. 어쩌다 지인과 만나 티타임. 그러고도 시간이 되면 넷플릭스 드라마 정주행 하기 아니면 웹툰까지. 매일매일 둘째 하원 전에 밥과 생존요리까지. 기도와 명상을 위해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결심하기로는 넷플릭스, 유튜브프리미엄, 티빙 구독을 이번 달 말까지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유예기간을 심히 후하게 주고 있다.


까짓 거 끊어도 다시 구독하면 그만인데 구독 중지 버튼은 이리 멀기만 한가.


보람중독보다 더한 OTT중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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