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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김 Mar 29. 2024

앞, 뒤, 옆 챙기기_흘러넘치는 여유

젤네일, 소금마사지, 흘림체와 똥손 | 내딸과 집단따돌림극복기 열아홉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아닌 내게 한 달에 두어 번 사우나는 힐링이다. 더운 열기를 이기려 젖은 수건을 머리에 푹 쓰고 투명인간처럼 있다 나오기만 하기를 예닐곱 번. 슬슬 수건을 안 써도 열기를 견딜 정도로 내공이 생겼다.  


오전 7시와 오후 2시 사우나는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우주이다. 서로 다른 무리의 달목욕 안방마님들이다. 7시 할머니들이 손수 만들어 온 풀을 몸에 바르고 소금마사지를 하시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나눠 주셨다. 예전 같으면 새침한 척 '괜찮아요' 했겠지만 이젠 아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뭐 이런 걸 다' 하며 할머니들을 따라서 열심히 팔꿈치며 발 뒤꿈치 등등에 소금을 문질렀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흐르고 십 분도 훌쩍 넘긴다.


직접 만든 풀과 소금 같은 여유는 2시 사우나에도 있다. 새로 한 네일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며 한 마디 하면 옆에선 '예쁘기만 하구먼' 한다. 노랑색과 초록색을 교대로 글리터젤이라고. 그러고 보니 다른 분들 손톱도 젤로 반짝였다. 나도 거칠거칠 아무 색 없는 내 손톱을 보았다.


한때는 네일과 페디를 즐겼던 나다. 열심히 살았다 스스로 칭찬하며 선물처럼 오가던 단골 네일샵도 있었다. 키보드를 치다가 정리된 손톱을 보면 혼자 므흣한 기쁨이 있다.


둘째가 생기고는 네일샵도 사치였다. 집을 탈출하기가 쉽지 않다. 늦은 밤 셀프 네일이라도 하려고 장비를 장만했었다. 젤 램프를 먼저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네일재료 가게 사장님이 추천한 베이스젤, 탑코트 뭐뭐까지.  


손재주가 좋지 않고 뭐든 잘 떨어뜨린다. 남편은 나를 우리집 '흘림체'라 부르고 내딸은 내 손을 '똥손'이라 단정 지었다. 몇 번 '금손' 남편이 칠해 준 적도 있고 딸과 앉아서 시도도 했었다.


온 집을 진동하는 냄새에 질식할 것 같아 곧장 서랍행을 한지 얼마나 되었더라.

'힘들겠군'하는 둘째.


하루하루 삶과 죽음의 경계. 생존이 화두가 되면 아름다움을 쫓을 여유는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매슬로 욕구 5단계 피라미드의 제일 아래에 있는 것이다. 자기, 먹기, 싸기가 되어야 하고 그리고 소속감, 자기 존중 수립,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다는데. 여태껏 나는 새로운 일을 시도할 엄두가 안 난다.  얼마나 더 지나야 거기까지 가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주 전 대싱디바에서 배송료만 내고 '젤(스)티커'를 받았다. 딸이 친구 네일을 부러워해서 다이소에서 한 번 사 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카톡 광고를 보고 이벤트에 응모해서 받았다.  


사우나 이웃과 나누어도 남을 만큼 준비한 소금과 풀처럼, 나를 위한 선물 또는 젤네일하러 갈 여유가 내게도 오고 있다.


그렇게 믿는다.




양재역 화훼시장이 멀지 않아서 그랬는지 아직 낭만이 있던 시대라 그랬는지 첫 직장 근처에는 꽃집이 두어 개 아니 더 많이 있었다. 그것도 십여 년 전 얘기구나. 아무튼, 꽃집과 찻집이 함께인 곳은 단골로 삼기도 했었다.


사무실 공기에 숨 막히고 머릿속을 좀 비워야겠다 싶을 때 사무실을 나서서 향하던 곳은 꽃집이었다. 둘러보기만 해도 좋고 그날 맘에 드는 꽃이나 화분을 만나면 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내 눈앞이 다 꽃밭 같았다.


어린이집 원장님은 동백꽃이라는데 맞나요?


갑갑한 사무실 공기를 바꾸어주는 노란 프리지아는 향도 진하고 색도 좋다. 어쩌다 만나는 안개꽃이나 예쁜 화분도 조용히 나를 위로했다. 장미, 안개꽃, 프리지아, 튤립, 선인장 말고는 이름도 잘 모르는 나라도 예쁜 것을 보면 기분이 좋으니까.


화분은 키우는 재주가 없어서 주로 선인장을 사곤 했다. 귀여운 화분에 자그마한 선인장은 죽이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무실에서 화분 키우는 것은 어나더레벨이다. 건조한 공기와 바쁜 하루 사이사이 식집사의 의무까지 할 여유는 없던 주임시절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서가 따로 붙는 임원 방에나 커다란 화분이 놓여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앞 뒤 옆 보는 여유, 흘러넘치길 바래 본다.


꼬박 반년이 흐른 지금, 나는 겨우 1단계를 통과하는 중이고 이제서야 사회적인 욕구가 쫄쫄쫄 얼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처럼 나온다. 왕성하지는 않지만 다른 브런치 이웃이 쓴 글을 읽고 댓글도 달아보았다.  


이렇게라도 써 내려가야지만 살 것 같은 마음에 시작한 글쓰기였고 한동안 앞, 뒤, 옆 볼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열 번가량을 넘기고 보니 좋은 브런치 이웃과 좋은 글이 보이기 시작했다.


'브런치에는 좋은 글이 많고 좋은 글을 쓰시는 좋은 작가들이 참 많군. 이 말투는 우리 둘째 입에 붙은 습관. '힘들겠군'을 따라 해 본 거다.


바로 의기소침해졌지만 내딸이 무심히 한마디 했다.

'원래 아무 생각 없이 쓰던 거 아냐?'  


어라? 그랬네. 어느 순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겼구나. 피라미드 제일 아래에 있는 처지에서 살아 보려던 내가 잘 쓰고 싶기까지 했군.

머릿속을 가득히 메우고 암세포같은 나쁜 생각말고 살아보려고 쓰기 시작한 거였네?


그냥 쓰자.


친절한 이웃들의 라이킷은

'정말로,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도 한 걸음 내디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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