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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진 Nov 05. 2019

마라톤도 인생도 비슷한 게 많구나.

JTBC 마라톤  도전기 3

“아빠, 마라톤 잘 하더라. 내가 칭찬 스티커 하나 붙여줄게”


42.195km를 다 뛰고 난 다음날 저녁, 일곱 살 둘째는 샤워를 하고 나와 뜬금없이 나를 칭찬해 주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아들의 칭찬을 들으니 날아갈 듯 기뻤다. 관계가 바뀐 것 같긴 했지만 간만에 아들에게 받은 칭찬이 참 좋았다. 마라톤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경기장에 들어가기 직전 내가 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막판 1km를 힘겹게 달리는 순간 아이들은 나를 보았고, 아빠가 포기히지 않고 달리는 것을 응원해 주었다. 아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나를 보며 눈물이 찔끔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내가 달리는 걸 보면서 이런 저런 것을 느낀 듯 했다. 칭찬스티커를 붙여 줄 만큼 아빠를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마라톤에 대해 궁금해 하기도 했다. 도대체 마라톤이 무엇이길래 수많은 사람들이 달리는지 알고 싶어했다. 덕분에 아이들과 나는 내년에 함께 마라톤 대회에 나가기로 약속도 했다. 아이들에게 응원을 나오라고 하길 잘한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나름 아빠의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된 장맛처럼 슬금슬금 의미가 올라오다.


하지만 마라톤은 너무나 힘들었다. 아이들에게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나는 다리가 끊어질 것 같았고 걷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힘들다는 것 말고 다른 것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듯 싶다. 사람들은 감격해 눈물도 흘린다는 데 나는 끝났다는 생각에 후련하기만 했다. 큰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좀 쉬려고 누워 있으니 그제서야 하나둘씩 마라톤을 달리면서 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묵은지처럼 천천히 마라톤의 의미가 제 맛을 내기 시작했다. 힘들다는 감정이 사그라들면서 명치 끝에서부터 성취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 긴 거리를 잘 달렸다는 게 너무 좋았다.


근거없는 자신감도 생겼다.  달리는 동안 인생과 마라톤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달리기를 하면서 느꼈던 것을 그대로 인생에서 실천만 한다면(물론 그게 가장 어렵지만) 지금보다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1. 어려운 길과 쉬운 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오르막을 오를 때였다. 쭉 펼쳐진 오르막 길이 꽤 부담스러웠다. 언제 다 올라가야 하나 끝이 없어 보였다. 순간 김민식 PD님의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에서의 이야기가 생각났다.PD님은 자전거로 산을 오를 때 시야를 저 멀리 산 정상에 두지 말고, 아스팔트에 고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힘이 빠지지 않고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고 했다. 멀리 산 정상만 바라보면 진도가 나지 않아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전거 페달을 밟은 덕분에 한계령도 넘을 수 있었다고 했다.


나 또한 오르막에서 끝을 바라보니 너무 힘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아스팔트만 바라보았다. 확실히 힘이 덜 들었다. 언제 끝날지 몰라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달리는 순간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생각보다 가볍게 오르막을 오를 수 있었다.


인생도 비슷한 것 같았다. 너무 큰 목표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 목표를 좇기 보다는 지금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집중할 필요가 있겠구나 싶었다. 내 목표가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순간 순간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목표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리막길에서는 조금 반대였다. 내리막길에서는 아스팔트보다는 주변을 쳐다보며 달렸다. 쉬운 길을 간다고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주변에 있는 것들을 감상하며 나름의 여유를 즐겼다. 인생에서도 편한 길이라고 생각될 수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리막길에 취해서 나도 모르게 오버하지 말아야겠다고도 다짐했다.


2. 지치기 전에 쉬어라


5km마다 급수대가 있었다. 마라톤 동호회에서 만난 분은 꼭 나에게 급수대에서 물을 보충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셨다. 목이 마른다고 느껴지는 순간 물을 마시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목마름을 느끼기 전 수분을 보충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이 훨씬 몸에 도움이 된다고.


덕분에 나는 조금씩이라도 물을 마시며 갈증에 대비했다. 영양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지친 상태에서 먹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기에, 힘이 빠지기 전 에 먹어 영양을 보충했다. 덕분에 영양젤의 효과도 볼 수 있었다. 나의 몸상태를 봐가며 적당히 수분과 에너지를 공급했던 것은 "좋은" 기록으로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인생에서 번아웃이 오는 경우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마셔야 할 때, 영양젤리를 먹어야 할 때를 놓치고 계속 열심히 일하다가 슬럼프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몸이 주는 신호에 집중하고, 또 마음의 동요를 잘 느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기 치료다. 신호가 온다고 느끼는 순간 충분한 휴식을 갖고 몸과 마음을 쉴 필요가 있어 보였다. 번아웃 상태에서는 회복을 위해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달리며 알 수 있었다.


3. 주변에 휩쓸리지 말라


마라톤을 준비하며 이미지 훈련(?)을 했다. 혼자서 페이스를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내 옆에서 나보다 더 빨리는 사람들을 봤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동요하지 않고 나만의 페이스로 달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휩쓸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달리는 동안 이미지 훈련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나만의 페이스로 달리기 위해 노력했고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씩 나를 제치고 뛰어갈 때도 그들을 쫓아가지 않았다. 빨리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오래 가는 게 중요하다고 나에게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며 갔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감정의 심한 동요를 느끼곤 했었다. 괜히 나만 쳐지는 것 같아서 걱정되기도 했다. 그들을 빨리 따라잡는 게 중요한 것 아닐까 싶기도 했다.


마라톤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페이스에 휩싸이지 말자고 했던 것처럼 인생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페이스로 앞으로 나가는 것이지, 누구보다 더 빨리 가고 느리게 가고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인생도 오랫동안 가야 하는 길이기에 굳이 일희일비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누군가와 경쟁하는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어제의 나와 경쟁하며 길을 간다고 생각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인생과 마라톤, 너무 침소봉대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달리기를 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멈추고 나니 비로소, 이런 저런 인생의 희노애락이 마라톤에 녹여 있는 것 같았다. 마라톤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 정리가 되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쩌면 다음 마라톤을 더 기대하게 만들게도 했다. 내가 인생을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마라톤이 나에게 적잖은 가르침을 던져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래저래 당분간은 마라톤에 취해서 그 기분을 유지하며 살 것 같다. 고마웠다 마라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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