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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Mar 12. 2024

짐은 먼 곳에

동굴에서 와이파이까지

컨테이너로 일찌감치 부친 짐은 4월에나 온다고 한다. 출국 전 마지막으로 보낸 살림살이들은 감감무소식이다. 항공택배로 온다기에 금방 오겠거니 했는데, 공항과 항공사들이 연이어 파업 중이라 언제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공항이 파업을? 한다면 어떻게? 공항이 아예 정지 상태라 도착 예정이던 항공편도 그냥 취소되는 모양이다. 파업이 끝나 무사히 도착한다 해도 통관과 배송까지 하루 이틀 걸릴 일이 아닐 것이기에 그냥 체념하고 만다. 거기 든 게 뭐였더라, 기억도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그나마 나와 꼬마가 오기 전 달이 미리 집을 구해놓은 게 다행이었다. 영상이나 사진으로 본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많이 달랐다. 예상보다 더 좋았다. 아마 입주 전 말끔하게 새 단장한 벽-흰색 페인트칠이 되어있다- 그리고 2m70cm에 달하는 천장고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의 연식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10년 넘은 집이라고? 생활감 담긴 마룻바닥을 보니 10년의 세월을 이해했으나, 적어도 새하얀 벽과 잘 관리된 공용 부분을 보곤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허옇고 멀끔하고 무엇보다 텅 비어있었다.

독일에선 집의 기본 뼈대만 제공하고 나머진 세입자가 알아서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한다. 한국도 그러지 않나? 싶었으나 기본 뼈대의 개념이 좀 달랐다. 빌트인 가구는 물론 전등도 하나 없다. 화장실 전구만 겨우 달려있을 뿐 나머진 천장 자리에 전선만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그나마 전등을 달아보겠다고 달이 사놓은 사다리가 집의 휑뎅그레함을 더했다. 원래는 부엌 시설도 되어있지 않아 직접 부엌을 설치해야 했다고도 하는데, 다행히 여긴 부엌은 있다. 말이 되는 소린가? 부엌을 알아서 설치한다고? 정말이지 그렇다. 이사 올 때 부엌을 설치하고 이사 갈 땐 떼어가기도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싱크대와 작은 냉장고, 전열기구가 어찌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렇게 허허벌판의 집에 우여곡절 들고 온 짐들을 풀어놓는데 이건 참 캠핑도 아니고 수련회도 아니고. 휑한 집에 얼기설기 사람 사는 구색을 갖추려 하니 참 쉽지가 않다. 그나마 2주 먼저 들어온 달이 중고로 구해 온 식탁과 의자, 이케아에서 사 온 데이베드 하나가 가진 가구의 전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불편과 수고가 원통하지 않다. 워낙 단단히 각오를 하고 와서 그런가, 무엇 하나 새롭게 생겨나면 그저 반갑고 감격스럽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설치되던 날엔 드디어 묵은 빨래를 할 수 있다고 환호했다. (물론 옷장이 없기에 잘 마른 빨래들은 곱게 개어 바닥에 둔다) 집 안의 조명을 모두 단 날엔 그야말로 '빛이 있으라'를 만끽했다. 급조한 스탠드 불빛 아래 저녁을 먹던 때에 비하면 이 얼마나 천지개벽할 일인가. 그땐 거의 동굴 속 원시인이었는데.

급히 산 식기 몇 개, 작은 빌트인 냉장고, 손에 익지 않은 이케아 냄비세트, 그나마 좋은 걸로 산 휘슬러 압력솥. 그걸로 끼니를 꾸려나가다 전자렌지를 산 날엔 그게 또 신세계였다. 아, 이제 드디어 찬밥을 2분 만에 데울 수 있어! 너무 감동한 나머지 야심차게 닭 한 마리 사다가 백숙을 한 날엔 새로 산 압력솥을 고스란히 태워먹기도 했다. 그걸 벗겨내겠다고 세제 코너를 돌고 돌았지만 장황한 독일어 앞에 나는 고개를 떨궜다. 번역앱을 쓰거나 검색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마트에선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다. 정말이지 그렇다. 집의 인터넷도 2주 가까이 걸려 설치했는데 뭘. 모뎀이 도착한 날엔 액정 상단에 뜬 와이파이 로고에 어찌나 흥분했는지, 참으로 사소하게 벅찰 일이 많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쓸 수 있어서, 전자렌지가 있어서, 전등이 생겨서, 와이파이가 되어서 행복해진다. 원시에서 출발해 현대문명의 이기까지 인류 역사를 빠르게 복습하고 있다. 도어락대신 건물 현관부터 주차장과 창고, 쓰레기장, 우리 집 현관까지 통용되는 열쇠를 소중하게 챙기고, (그나마 첨단의 애플태그를 달아두었다) 아직 차가 없으니 대부분의 거리를 걷거나 대중교통으로 다닌다. 그 와중에 봄이 오고 있다. 엄마 화분은 꽃이 피는데 내 화분은 왜 꽃이 안 펴? 이 소리를 일주일간 들었는데, 드디어 꼬마의 화분도 꽃을 틔웠다. 예상한 대로 분홍색의 꽃이다. 요거트통에 옮겨 심은 바질도 제법 싱싱하게 자란다. 봄비를 받아 화분에 물을 주며 다시금 허전한 집을 둘러본다. 이 풍경이 그리울 날도 오겠지, 이상하게 긍정적으로 변한 내가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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