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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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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Apr 20. 2024

133개짜리 마음의 짐

방황하던 네덜란드인 아니, 우리 이삿짐

드디어 짐이 도착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바다 위를 떠돌던 짐이 무사히 함부르크 항에 도착했고, 기차를 타고 세관을 거쳐 집으로 오는 날이다. 우리 이삿짐도 방황하던 네덜란드인이 맴돌던 그 희망봉을 지나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다. '오긴 오는구나'와 '올 것이 왔구나'의 사이,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이 주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막스라는 이름의 직원은 '빙고'라며 숫자로 빽빽한 종이 한 장부터 건네주었다.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박스의 번호를 체크하면 되는 거라고 했다. 박스의 개수는 총 133개. 거기엔 없는 게 없을 터였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전날 밤, 포장한 항목들을 기록해 둔 표를 보고 미리 배치를 구상해 두었다. 1번 박스는 거실, 2번 박스는 부엌, 3번 박스는 발코니 이런 식이었다. 박스를 든 직원들이 현관문에서 번호를 부르면 빙고에 체크를 한 후, 배치표를 보고 어디로 가라고 말해주면 되었다. 짐들은 순식간에 집안 곳곳을 메웠다. 박스 옆에 박스, 박스 위에 박스. 꼬마는 기어코 맨 윗 박스까지 기어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조그만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했다. 나는 잠시 꼬마를 꼬셔 산책을 다녀왔다. 물, 콜라, 환타, 그리고 빵 한아름. 이삿짐센터 직원들을 위한 간식을 사들고 돌아오니 133개의 박스는 모두 집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좋아, 일단 분실된 건 없다는 거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휴식을 가진 후, 박스 대개봉의 시간이 이어졌다. 온 방에서 박스 테이프를 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스를 열 때마다 그립고 애틋한 짐들이 그야말로 쏟아져 나왔다. 여러모로 허둥지둥거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부엌살림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다. 아르만이란 이름의 아저씨와 짝이 되어서. 아르만이 박스를 뜯고 포장종이를 풀어 물건을 건네주면 그걸 받아 찬장과 서랍을 채워나갔다. 아르만의 손이 빨라 나도 덩달아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작업용 장갑과 작업용 발판까지 지참한 나는 점점 숙련공이 되어갔다. 덕분에 노심초사하며 기다렸던 식료품의 상태를 살펴볼 수 있었는데


다행히 상하거나 깨진 것 없이 모두 멀쩡하다. 장하고 기특했다. 희망봉을 지나오느라 적도를 두 번이나 건넌 너희들. 모양도 색도 괜찮았다. 수많은 병들 사이에서 냉면 육수 농축액을 발견하곤 어찌나 반갑던지. 마음은 벌써 살얼음 낀 육수 속에서 두 번째 사리를 말고 있었다. 그 상상을 하자 적잖이 배가 고파왔는데, 아르만의 능숙함에 장단을 맞추느라 슬쩍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다. 부엌 용품 정리가 끝이 나자 그제야 달이 사 온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었다. 노동 후 먹는 마른 빵의 맛은 기가 막혔다. 사실 뭘 먹어도 든든했을 것이다. 새로 온 김치냉장고의 위엄, 작은 팬트리를 가득 채운 각종 한국 식자재, 무엇보다 반가운 한국쌀. 게다가 그건 백진주쌀과 수향미였다.


한국 이삿짐센터처럼 집에서 집을 그대로 옮겨놓는 건 아니어서, 지정한 위치에 모든 짐을 풀고 큰 가구들의 조립과 배치가 끝나자 직원들은 슬슬 갈 준비를 했다. 분명 책은 책장에, 옷은 옷장에 들어있으나 아무래도 다시 싹 엎어서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수고한 직원들이 떠나고 우린 온갖 먼지와 모래 가득한 집에서 서로를 얼싸안았다. 피곤에 절은 몸으로도 일단 꼬마의 방 정리에 마지막 열정을 불살랐다. 겨우 이부자리만 갖춰놓은 방으로 꼬마가 자러 가자 집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너무 요란해 눈 둘 곳이 없었다. 어디 좀 앉으려고 해도 주섬주섬 짐들을 헤치고 자리를 발굴해야 했다. 그래도 내 짐이다. 짐은 짐인데 마음의 짐. 무려 133개짜리 마음의 짐.     


고생 끝에 고생이라고, 그 짐들을 정리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문제해결과정이 순차적으로 그려졌다. 각 구역을 정하고 처단해야 할 대상을 선정한 다음, 상태를 확인 후 재배치한다. 오늘은 부엌, 내일은 거실, 다음날은 욕실과 옷장들. 아무래도 집 안에서만 시간을 보낼 터이니 꼬마의 지루함이 문제였는데, 그건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구석구석에서 그립고 애틋한 장난감들이 튀어나왔으니. 아기 때부터 좋아하던 폭스바겐 버스를 발견하는 바람에 온 집안 먼지는 꼬마의 무르팍으로 닦을 수 있었다. 그걸 저지하기엔 여력이 없었다. 약간 해탈한 상태로 나는 계속 전진해 갔다. 그러다 로봇청소기를 만났을 땐 얼싸안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친구가 영 납작해서 안기는 무리였으나 일단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자, 가라! 어서 바닥을 쓸고 닦아!


그런데 상태가 이상했다. 완충된 배터리를 다 쓰고도 집 전체를 돌지 못했다. 앱으로 확인해 보니 그려놓은 지도도 엉망이다. 방이니 복도니 벽이니 그림은 그려놨는데, 제 동선은 그 지도를 다 무시하고 돌아다녔다. 뭐랄까, 금기도 규제도 다 부수는 저돌적인 연애랄까. 그러더니 충전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완전 소진 후 회복되지 않는, 급기야 스스로까지 불태우고 마는 연애의 후유증. 안 돼, 난 너만 믿어왔다고. 여러 번 재부팅을 하고 공들여 센서를 닦아주고, 심지어 충전기 플러그의 위치도 바꿔보는 절실한 나. 결국 이틀 동안의 간병 끝에 로봇청소기는 살아났다. 아무래도 너무 혹사시켜서 그런 듯 보였다. 드디어 지도도 제대로 그리고, 집안 곳곳을 광이 나도록 닦아놓는다. 그제야 안심하는 나. 그제야 맨발이 편안해진, 마음도 편안해진 나.

이렇게 저렇게 없는 공간도 짜내어 집이 정리된 것은 로봇청소기의 행차를 돕기 위한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아직 구석구석 짐들이 무더기로 쌓여있고, 쌓아 올린 수납박스 속을 들여다보긴 두렵고, 그 소란 속에 달의 국제면허증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젓가락 두 벌로 살아오던 날은 이제 안녕이다. 냄비에 물 끓여 커피를 만들고, 도마 없이 싱크대에서 감자를 썰고, 몇 벌의 옷으로 돌려 막던 시절도 안녕. 세 명이서 한 이불 덮고 옹송그려 자던 노지캠핑의 날도 안녕. 아직 부산스러운 집을 떠나 저는 내일 베를린으로 떠납니다. 그것도 혼자. 혼자라는 대목에 밑줄을 왕창 긋고, 형광펜을 벅벅 칠해도 이 벅찬 마음을 다 표현하긴 어렵겠지요. 아무튼 저는 떠납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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