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고르지 않은 여름이 지나고, 10월이 왔다. 찬란한 여름 따위는 없었지만, 여전히 뭉근한 기대를 가진 낙엽들 위로 바람이 분다. 아침저녁으로 안개 낀 동네가 눈곱 낀 아이들의 동무가 되어주며, 마법처럼 낮을 밝힌다. 뛰어가는 모양이 안개를 뒤로 한 채 희미해지면, 소리 높여 아이를 부른다. 아파트 단지 내로 메아리치는 목소리가 다시 귓가로 돌아오면, 나를 휘감은 안개가 얼마나 감사한 지, 부끄러운 얼굴을 감춘다.
가을은 이토록 흐릿하지만, 선명하게 그 색을 드러내며 발끝을 스치고, 우리는 올해도 어김없이 미리 가을을 아쉬워한다. 가지 말았으면 하는 것은 계절일까, 아님 인생의 가을일까. 제 각각의 색을 띠고 각자의 계절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는 궁금하다. 제 계절을 싫어하기도, 좋아하기도 하겠지,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일 테고. 그들의 계절 안에 내 계절이 함께함을 나는 그 어우러짐으로 안다. 붉고 푸른 것이 혼재한 낙엽과 우리의 삶이 나란히 가고 있음을 금세 같이 갈색으로 물드는 잎을 보고 안다.
연일 신문에 오르락 거리는 대통령과 마약 사범들과 전쟁은 어느 것 하나 광기가 아닌 것이 없고, 가을의 만연함은 즐길 세 없이 광활한 뜨거움과 지독한 차가움 사이에 서 있다. 어느새 가을은 여름과 겨울 그 중간의 무엇이 되고, 올해도 기대를 저버린 채 낙엽은 진다.
지난달, 아파트 단지 내에서 추락사가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이른 새벽에 창 밖으로 몸을 던지신 할머니는 가족이 함께 있음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세상을 등지셨다. 동네 엄마들은 아이들이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다. 무엇이 다행인 건지. 그때부터 이미 시작된 냉기는 11월에 스러진 또는 스러질 많은 얼굴들을 만나러 가겠지. 알지 못하여 막을 수 없는 일에 대한 좌절과 나약함이 내 안에 또 다른 광기를 만든다.
나란히 가고 있음이 분명한데, 만날 수 없고, 영원토록 계속될 것처럼 단절되어 있다. 평행은 만날 수 없다. 만나지 않는 십자가는 없다. 기대 서지 않는 다면, 쓰러질 것이다. 가을은 ‘Fall’의 계절이다. 중력을 거스르는 인간이 없듯이, 중력을 거스르는 잎은 없고, 삶의 가을을 거스르는 인간은 없다. 다만 그 계절이 오기까지 숱한 봄과 여름이 있었음을 감사하고, 새 겨울이 결코 혼자이지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꺼지지 않는 광기를 동력 삼아 겨울을 날 것이다. 이 가을의 기대가 헛되지 않게. 쓰러지는 이 있다면, 내 등으로 받칠 것이다. 나를 받쳐준 수많은 거목들의 흔들림을 나는 모른 채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끝내 멈추지 않도록, 삶에 애정을 담는다. 화로 굴린 바퀴는 금방 불타 버릴 것을 알기에, 가을까지만 쓰고, 겨울은 사랑으로 날 것이다.
문을 꼭꼭 닫고 있다. 추워서이겠지. 하지만 이제 더는 안에서 곪아 나는 악취들이 바깥으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입막음할 수 없다. 세상은 변했고, 가정도 변했다. 사람들은 더는 광기를 놓치지 않는다. 가을이 뭉근하게 지나간다고 해서, 겨울을 준비하지 않는 이는 없다. 나라의 안팎에서 지켜보는 눈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이겨내야 한다. 혐오와 다툼을 초래하는 수많은 전쟁은 언제든 끝나야 하고, 이제는 사랑을 보여줄 때다.
개미는 베짱이에게 나눌 것이 많았는지 몰라도, 우리는 나눌 것이 없는지 몰라도, 우리가 대대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사람은, 아니 동물조차도 같이 사는 거다. 인사를 건네야 하고, 안부를 물어야 하고, 가끔 부리는 오지랖이 그 사람에게 애정으로 건네 져야 한다. 우리의 이웃이 인정을 저버리고, 어느 새 나의 다정한 할머니 생각에 상념에 빠질 지라도. 우리의 나라가 나를 실망시키고, 어느새 멀고 먼 나라의 바닷가에 서 있고 싶은 생각에 빠질 지라도. 삶이 배반할 지라도 우리는 삶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 만이 유일한 사랑이고, 그런 사랑으로 삶을 살 수 있기에. 오늘도 놀이터에서 인사를 건넨다. 결코 평행하지 않도록. 이 가을이 떨어짐으로만 끝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