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주간에는 어김없이 몸이 아프다. 마음의 짐이 늘 몸을 짐으로 만드는 데 한몫한다. 그런데도 나는 쉽사리 밥 짓기를 포기할 줄을 모른다. 왜, 왜 나는 밥에 집착하는가.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알레르기가 워낙 많아 많이도 지어 먹였다 치지만, 이제 아이들도 많이 자랐고, 남편도 아침을 즐기는 사람이 아닌 데도 나는 밥 하기를 포기할 줄 모른다. 오늘은 새벽 예배를 다녀와서 지친 몸을 재우지 않고(고난주간에만 나간다) 밥을 짓는 나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참, 미련타…’
정작 내 밥은 잘 챙기지 않으면서 말이다. 아무래도 한국 엄마들의 특징이 아닐까. 오전 내내 쓸고 닦고, 아이가 올 때가 다 되어서야 한 끼 때우는 습관이 습관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한창 일하느라 바쁠 때도 퇴근하면서 본 장으로 저녁을 먹이고, 일주일에 한 번은 반찬을 잔뜩 만들어 두었다가 가족을 먹였다. 가족의 감사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다. 그저 나의 만족을 위해서 했을 뿐. 그러다 몸이 아프고 나니, 나의 밥 사랑은 더욱 심해졌다. 아이들이 마르면 마른 대로문제, 살찌면 살쪄서 문제. 삼 시 세끼, 간식 두어 번, 공부는 안 시켜도 운동은 시켜가면서 밥을 열심히도 먹였다. 그런데 참, 항암 치료를 하면서는 손이 떨려 밥을 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편은 그저 사 먹으면 된다고 했지만, 마음에 차지 않았고, 급기야 밥을 잘 못하는 남편이 밉기까지 했다. 밥 때문에 남편이 밉다니, 밥 하려고 결혼한 것도 아니고, 먹고사는 거보다 정신 건강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녔던 내 입이 방정이었다. 나에게 밥은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이자, 가족을 위한 나의 사랑이자, 삶이었던 것이다.
한창(?) 아플 때, 남편이 퇴근하고 잔뜩 쌓인 설거지를 보면서 ‘오늘도 힘들었구먼’ 했다. 내 입으로 들어갈 것도 아니면서(잘 먹지 못했기 때문에),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곤 했다. 아이들이 잘 먹는 모습이 행복이었고, 한 시간이라도 쓸모 있는 인간이고 싶은 나의 마음을 가장 충족시켜 주는 일이었다. 한참 동안 지지고 볶다 보면, 감각 없는 손끝에도 감각이 다시 도는 것 같고, 비누를 문 것 같은 내 입에도 잠시 잠깐 군침이 돌았다. 그럼 살아 있는 것 같았달까. 그러나 나도 사람이기에 매 끼니마다 밥을 해내야 하는 것은 크나큰 부담이었다. 누구도 내게 책임을 물은 적 없지만, 밥을 못 챙기는 것은 아이들을 학대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결국 남편은 휴직했다. 남편에게는 내가 병원에 가면 아이들을 돌보아줄 사람이 없고, 우리 네 식구 한 해 행복하게 쉬어 간다 생각하자고 설득했지만, 사실은 애들 끼니 걱정이 제일 컸다. 밥을 못 챙기는 것은 내게 너무나 큰 죄였기에. 남편을 쉬게 하고, 밥 하는 것을 가르쳐 서라도 애들을 먹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이기적인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결국 내 뜻대로 남편이 밥을 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그 외에 것들을 남편이 도맡아 하면서 나의 밥 집착을 지킬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옛날 사람이다. 이토록 밥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때론 사랑한다 크게 말하는 것보다, 고모가 나 아프다고 끓여준 전복죽이, 할머니가 무쳐주던 냉이 무침이, 내겐 더 큰 사랑이기에 그렇다. 어쩌면 어릴 적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했다 생각하는 것도 엄마가 밥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아프고 나서 처음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내 끼니를 온전히 챙기는 것이었다. 나 혼자 먹기 위해 상차림을 한다는 것은 낯설지만 더없이 귀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 밥 = 사랑 법칙이 내게 성립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내가 해준 밥을 먹어 본 당신들, 알아주기를. 불고기는, 곰탕은, 이상한 아줌마의 사랑한다는 외침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