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기 싫음 후회할 일들을 후회하기 전에 후회 말아
실패를 하지 않는 편입니다. (지금 생각나는 실패는, 500원짜리 인형 뽑기 정도네요. 성공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지만 그래도 꾸준히 합니다.) 제가 실패하지 않는 비결은, 실패할 일을 하지 않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실패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시작조차 안 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후회입니다. '아 그때 그렇게 할걸.' 누구나 인생에서 여러 번 후회를 하며 살지만, 저는 유독 후회의 횟수가 많은 편입니다.
가장 최근의 후회는 이직이었습니다. 갈까, 말까, 지금인가, 지금이 아닌가, 거기가 맞나, 다른 데가 낫지 않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런 고민을 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망설이는 건 안락한 둥지(생각보다 꽤 안락한, 번듯한 둥지거든요)를 떠나야 하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고, 그게 아마 회사가 주는 안정감이면서, 동시에 족쇄였던 것 같습니다. 안정된 직장을 괜히 박차고 나가서 실패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비겁하게도 가족과 주변의 만류를 핑계로 이직을 포기했고, 옮겨서 실패할 일은 없을 테니,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갈 테니, 잘한 선택이었다고 위안했습니다.
고려 대상이었던 회사에 최종적으로 이직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하고 3-4달쯤 지나서였나요(지난 달입니다). 거짓말처럼 제가 있었던 팀이 하루아침에 해체되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갈 줄 알았는데, 불러주는 데 없이 처량한 신세가 됐습니다. 오랫동안 저를 지켜줄 줄 알았던(뭐 정년까지 다닐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나이 마흔도 되기 전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회사는 제가 눈치 못 챈 사이에 저에게 정을 떼려고 하더군요. 솔직히 조금, 아니 많이 당황했습니다. 50이 넘어서 등 떠밀려 회사를 떠나는 선배들을 많이 보았고, 40 중반에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려 회사를 박차고 나가는 선배들도 종종 봤지만, 저는 계속 아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회사가 어려워져서 사람들을 많이 내보내더라도 저는 그 대상이 아닐 거라고 안심했었습니다.
며칠을 멍하게 보내고 나니,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불러줄 때 갈걸.' 아무런 선택을 안 해도 실패하는 일이 생기더군요. (보통 선택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실패는 안 하는 편이었거든요.) 저는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뭘 해도 후회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걸 깨달으니까 조금 정신이 들었습니다. 저는 신중한 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현실을 계속 비겁하게 피해 가며 살아왔던 겁니다.
생각보다 큰 시련을 겪으니까, 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후회하는 시간이 아까워지더군요. 안정된 회사를 다니며 미뤄두었던 40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습니다. (마침 시간이 또 많아지기도 했고요.) 무슨 답을 찾게 될지, 준비는 잘 될지 걱정은 되지만, 왠지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회하는 게 곧 실패라는 값진 경험을 이번에 얻었거든요. (이런 일이 이제라도 생겨서 정말 다행입니다. 더 늦었으면 제 후회병은 불치병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불안정한 상황은 생각보다 더 길어질 것 같습니다. 연말이 될지, 내년이 될지 모릅니다. 회사가 나아진 다는 보장도 없고, 그때 저를 다시 불러준다는 보장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많은 선택을 하게 되겠죠. 후회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 지난 선택들을 후회 없이 믿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삶의 정답이다.” 얼마 전 MBC 사장이 되신 박성제 기자님이 지은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회사에 맞서 싸우다 부당하게 회사에서 해고된 기자님은 복직의 보장도 없는 몇 해를 지내면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스피커를 만드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책은 그 당시에 지은 책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바비'도 멋진 말을 했습니다. "오늘을 놓쳐서 후회한다면, 후회한 시간을 후회할 거잖아, 후회하기 싫음 후회할 일들을 후회하기 전에 후회 말아." (이런 멋진 말을 하는 사람이라니.) 앞으로 인생을 인형 뽑기처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500원 넣고 계속하다 보면 실력도 좀 늘고 언젠가 인형도 뽑을 수 있겠죠. 인형을 못 뽑아도, 원하지 않던 인형이 나와도 괜찮습니다. 어쨌든 제가 500원을 넣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