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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Sep 02. 2018

복숭아 아이스티

"그냥 이거라도 내 마지막 꿈으로 남겨 두고 싶어서."


[#] 노래를 듣고 떠오른 이야기로 만들어진 미니 연재소설입니다. 해당 노래를 들으며 읽어 보세요. 참고로 지금 외롭고 웃긴 가게에서는 아이유의 복숭아가 흐르고 있습니다.

☞ 아이유의 '복숭아' 듣기



오랜만에 단체 손님이 왔다. 영선에게는 운이 좋은 날이다. 양복을 어설프게 입은 청년과 여러 명의 학생들이었는데 왠지 분위기가 묘했다. 양복 입은 청년은 침을 튀기면서 계속 혼자 이야기했고, 학생들은 고개를 숙인 채 엄한 음료수 빨대만 쪽쪽 빨고 있었다. 대충 내용을 들어 보니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무원이 된 선배와 행정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 후배들인 것 같았다.


“뭐, 시험공부하는데 노하우가 있겠냐? 그냥 죽어라 하는 거지.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죽어라 한다고 다 되는 건 또 아닌 것도 같고. 내 보기엔 운도 어느 정도 있어야 되는 것 같더라.”


양복 입은 선배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질 때쯤, 또 다른 후배로 보이는 학생 하나가 불쑥 카페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후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인사를 하자, 양복을 입은 선배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지갑을 꺼냈다. 장지갑에서 신용카드를 하나 뽑더니 후배한테 냉큼 건넨다.


“이걸로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시켜 먹어!”


후배는 당황했는지 그 명함 같은 신용카드를 잠시 멍하니 쳐다본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열기를 쏟아내며 그 후배는 영선에게 다가갔다. 후배는 메뉴 판을 훑어본다. 자신이 원하는 음료가 있는지 찾은 같기도 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영선은 후배가 어떤 음료를 시킬지 궁금했다.


“복숭아 아이스티 주세요!”


영선은 약간 실망스러웠다. 후배가 좀 더 비싼 음료를 시킬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소박한 후배가 영선에게 건넨 신용카드를 보니 연회비가 장난 아니라고 소문이 자자한 VIP 카드였다. 몇 마디 말보다 이런 고급스러운 신용카드가 자신의 위세를 드러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영선은 음료를 준비하면서 두 볼이 아직도 불그스름한 그 후배의 얼굴을 힐끗 보다가 생각한다. 복숭아 아이스티를 기다리는 소박한 후배의 얼굴이 항상 부끄러워 보이는 복숭아를 닮은 것 같다고.   




복숭아를 좋아하나요?


#복숭아 - 노래소설


고시원 골목을 돌아 동네 슈퍼 앞을 지나는데 달콤한 복숭아 향이 콧속으로 파고든다. 과즙이 흥건한 복숭아를 깨문 것처럼 어느새 입안에 침이 고인다. 복숭아 한 상자에 30,000원. 10개도 들어 있지 않는 것 같은데, 30,000원이라니! 고인 침을 얼른 삼키고 시선을 돌린다. 대신 오늘 모임에선 시원하고 달콤한 복숭아 아이스티를 마시기로 마음먹는다. 늦여름이라고는 해도 아직 낮에는 한여름처럼 뜨거웠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 보니 오랜만에 꺼내 입은 빳빳한 칼라셔츠가 불편할 정도로 땀이 흐른다. 땀에 젖은 목 칼라는 자꾸만 마른 낙엽처럼 달라붙는다. 냉방이 잘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다. 다행히 저만치 모임이 있는 카페가 보인다. 전력을 다해 카페로 뛰어 들어갔다.


이 모임은 행정고시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꽤 유명한 스터디 모임이었다. 때문에 이 스터디 모임에서 합격자들이 꽤나 많이 나왔다. 오늘은 특별히 이 모임 전 기수 선배가 찾아와 시험 합격 노하우를 설명해주는 날이었다. 카페로 들어서자 긴 테이블 맞은편에는 누가 봐도 위풍당당한 선배 하나가 당당하게 앉아 있다. 선배에겐 이상한 후광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그 앞에 앉은 고시생들의 얼굴은 여전히 칙칙하다. 선배는 기브스를 목에 두른 것 같은 자세로 앉아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자신의 성공담을 설파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후배들을 야단치고 있는 것 같았다. 늦게 온 나는 민망함에 꾸벅 인사를 하고 조용히 빈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그런데, 선배가 나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어이! 뭐 시켜야지!”

“아, 아뇨. 괜찮습니다.”

“이걸로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시켜 먹어!”

“아, 네! 감사합니다.”


카드를 내게 건넨 선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자신의 성공담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선배가 건넨 신용카드는 금장을 두른 카드였다. 이젠 신용카드에서도 후광이 보이는 것 같다. 복숭아 아이스티를 주문하고, 이마에 땀을 닦았다. 땀에 젖었던 칼라는 그제야 목에서 떨어진다. 복숭아 아이스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잠시 뒤를 돌아봤다. 저만치 둘러앉은 모임 사람들과 선배가 보인다. 사실 조금 의아했다. 친분도 없이 그저 공부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스터디 모임일 뿐인데, 선배라고 해도 진짜 선배가 아닐 텐데, 음료까지 쏘겠다니.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선배가 건넨 카드를 다시 한번 쳐다본다. 선배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는 신용카드가 나를 보며 뻐기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선배는 쏜다는 핑계로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나도 언젠간 얻게 될 성공일 테니까. 무엇보다 이렇게 시원한 카페에서 공짜로 봉숭아 아이스티를 마실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가난한 고시생에겐 이런 일도 과분한 일이다. 그러니 쓸모없는 자존심 따위는 잠시 접어두어야 한다.


“어이! 혹시 상문고등학교 나오지 않았어?”

“아, 네. 어떻게 아셨어요?”

“얼굴이 눈에 익는다 했더니 맞네. 나도 상문이거든.”


자신의 성공담이 거의 끝나갈 무렵, 뜬금없이 선배는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더니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내 공감을 얻어내려고 무진장 애썼다. 결국 옛 추억에 심취한 선배는 자신이 오늘 저녁까지 책임지겠다며 고시생 모두를 끌고 정육식당으로 향했다. 모임 사람들은 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가난한 고시생에게 고기를 마음껏 먹게 해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고시생들은 한 명의 낙오자 없이 정육식당에 입성했다. 고기를 먹는 내내 선배의 성공담과 추억담이 지칠 줄 모르는 엄마의 잔소리처럼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술과 고기로 배를 채운 고시생들은 갖은 핑계를 대며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직속 고등학교 후배인 나는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아까부터 가고 싶었던 화장실도 못 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화장실을 갔다 오니 자리에는 선배와 나만 남아 있었다. 술이 취해 횡설수설하는 선배를 바라보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 술을 더 마시라는 주사를 부리는 선배에게 조용히 물었다.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그제야 선배는 크게 동의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배는 금장 두른 신용카드로 계산을 하고 휘청거리며 가게 문을 나섰다. 그런 선배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당당하게 보여야 할 선배의 어깨가 왠지 모르게 측은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내가 선배보다 더 취했나 보다. 가난한 고시생 따위가 고시에 합격한 선배를 측은하게 생각하다니! 얼른 마음을 고쳐먹고, 선배를 따라 가게 문을 나섰다.


밤공기는 낮과는 다르게 선선했다. 결국, 그렇게 패악을 부리던 여름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취업이라는 것도, 시험이라는 것도, 이렇게 때가 되면 가고 오는 계절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이 흐르면 그냥 누구나 자연스럽게 취업을 하고 합격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하며 걷고 있는데, 선배가 과일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나도 따라 걸음을 멈춘다. 선배는 예쁘게 쌓아놓은 복숭아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복숭아 한 상자에 35,000원. 아침에 동네 슈퍼에서 봤던 것과 비슷해 보이는데, 5천 원이나 더 비쌌다. 신기했다. 비싸다는 생각이 들자 군침도 돌지 않았다.


가난한고시생에게복숭아는사치였다.


“복숭아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했지. 시험 합격하면 복숭아를 상자 째 사서 실컷 먹어보는 게 꿈일 만큼.”

“하하, 그럼 이제 실컷 드실 수 있겠네요.”

“아니, 난 이제 복숭아 절대 먹지 않을 거야."

"아니, 왜요?”

“이거라도 그냥 내 마지막 꿈으로 남겨 두고 싶어서.”

“네?”

“내가 꿈을 이룬 건 같긴 한데, 이상해. 요즘은 그게 진짜 꿈이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


솔직히 나는 선배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선배는 자신이 바라던 나비가 되어 훨훨 날고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이파리를 파먹으며 꿈틀거리는 애벌레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궁금하기는 했다. 애벌레는 과연 처음부터 나비가 되는 게 꿈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졌다. 선배도 나도 과연 행정고시 합격이 진짜 꿈이었을까? 그 꿈을 이루고 나면, 지금보다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와 같은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룬 선배는 지금 행복한 걸까? 아닐까? 만약 행복하지 않다면 행정고시 합격이라는 선배의 꿈은 잘못된 것일까? 그렇다면 내 꿈도 잘못된 것일까? 어쩌면, 나는 살기 위해 선택한 직업과 꿈을 헷갈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난 이제 복숭아를 절대 먹지 않을 거야는


“혹시, 복숭아 좋아하냐?”

“네, 저도 무지 좋아합니다.”

“여기요! 복숭아 한 상자 주세요!”


선배는 내게 꽤 무거운 복숭아 상자를 안기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비틀거리며 저만치 걸어가는 선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김없이 탐스러운 복숭아 향이 코를 간지럽게 파고든다. 어느새 군침도 스르르 돈다. 덕분에 모든 고민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내 꿈이 내 선택이 어떤 것이든, 오늘은 그렇게 먹고 싶던 복숭아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다음화에서 계속...



#신용카드의또다른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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