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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Jun 09. 2023

Y, H, 그리고 강원도에게(상)

이상국, <집은 아직 따뜻하다>

그 해 여름, 그러니까 1998년 여름에 우리 세 사람은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이 내게 두고 두고 그리운 여행이 될 줄은 그 때는 몰랐어. 시간이 지날 수록 트미해지는 기억도 많지만 그리움의 밀도가 커지는 추억이 있더라. 그런 추억을 많이 만들며 사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이 아닌가 40대 중반이 되어보니 조금 알 것 같다.


우리는 대학교 2학년이었고 역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학도였다. 우리의 여행 목적은 '사전답사' 였어. 우리 세 사람은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과방에 모였어. 그리고 사학과 98학번 가을학기 정기 답사를 준비하기 위해 답준위, 즉 답사준비위원회를 꾸렸지. 우린 3주간 매일 도서관에서 답사 주제와 답사 지역을 논의했고 결국 강원도로 결정했다.


7월 마지막주에 우리는 부랴부랴 사전답사를 떠나야 했어. 지도에 표시만 해 두었던 강원도 곳곳의 사찰과 동선을 눈으로 걸음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거든. 사전 답사의 목적은 답사 코스를 확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40명의 학우들과 담당 교수님이 묵을 숙소, 그리고 삼시세끼 식당도 물색하기 위함이었어. 8월에는 버스 예약부터 세미나 자료, 답사 때 입을 단체 티셔츠까지 정할 게 많았으니 7월의 사전답사는 꼭 성공적이어야 했지.


우리는 아침 일찍 청량리 기차역에서 만났다. 각자의 배낭에는 일주일간의 여행을 위한 옷과 세면도구, 노트와 필기도구를 챙겼다. 우리의 대장격인 Y는 가볍고 얇은 하계용 텐트를 챙겨왔고 나는 옷은 최대한 줄인 대신 침낭을 챙겼지. H는 아마도 얇은 은박 돗자리를 가져왔던 것 같아. 누군가 코펠과 버너를 챙겨왔는데 정확히 누구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쌀도 누가 가져갔더라...나였을까? 그래 아마 나였을거야. 우리 중 유일한 여학생인 나는 너희보다는 조금 더 세심해서 쌀을 챙겼던 것 같다.


7만원씩 갹출한 후 총무를 맡은 나는 21만원으로 5박 6일간 살림을 살아야 했어. 우리는 첫째날 원주를 거쳐 정선의 고한읍으로 갈 예정이었어. 그곳에는 아름다운 수마노탑을 품은 사찰이 있었거든. 그런 다음 동해와 양양, 속초를 훑을 예정이었지. 우리 답사의 주제는 통일신라와 화엄종이었어. 지리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통일된 신라 왕실은 강력한 전제 왕권을 뒷받침하는 화엄종과 뗄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우리는 그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강원도의 오래된 사찰을 탐방해야 했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나. 그때 들렀던 사찰들이 어디어디였더라...


그런데 말야. 우리가 강원도로 떠난 그 해에 강원도 출신의 어느 시인이 아주 곱디 고운 시들만 엮은 시집을 냈었더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강원도 하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강원도의 힘>을 먼저 떠올릴 테고, 서핑을 좋아하는 사람은 속초의 푸른 바다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나는, 강원도 하면 가장 먼저 양양 출신의 이상국 시인이 떠오른다.




흐르는 물이 무얼 알랴

어성천이 큰 산 그림자 싣고

제 목소리 따라 양양 가는 길

부소치 다리 건너 함석집 기둥에

흰 문패 하나 눈물처럼 매달렸다


나무 이파리 같은 그리움을 덮고

입동 하늘의 별이 묵어갔을까

방구들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입은 사람들 어른거리고

이 집 어른 세상 출입하던 갓이

비료포대 속에 들어 바람벽 높이 걸렸다


저 만리 물길 따라

해마다 연어들 돌아오는데

흐르는 물에 혼은 실어보내고 몸만 남아

사진액자 속 일가붙이들 데리고

아직 따뜻한 집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만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 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어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이상국 <집은 아직 따뜻하다>




그런데 참 우습게도 그때의 나는 지금만큼 시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어. 물론 좋아하는 몇 명의 시인과 몇 권의 시집이 있었지만 문학소녀라고 칭하기에는 문학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부족한 건 사실이었어. 훗날 나이 들어 내가 시를 쓰게 될 줄은 그땐 전혀 알지 못했다. 오히려 진짜 문학소년은 바로 Y 너였지.


부산이나 밀양의 억양과 달리 진주 특유의 말랑말랑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던 너는 시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문학소년이었어. 고등학생 때 백일장에서 시로 상을 받기도 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진주는 이형기 시인과 박재삼 시인을 배출한 고장이기도 하구나. 두 시인 모두 촉석루 예술제에서 시 부문으로 나란히 장원과 차석이었다. 네가 상을 받았다는 백일장도 혹시나 같은 예술제였을까?


나는 다른 남자 동기들 중에서도 특히 네가 마음에 들었었어. 남자로 좋아한 건 아니지만 너의 눈빛은 거친 사내놈들과 다르게 순수함과 세심함이 엿보였지. 우리가 아직 새내기였을 때 서로 대화하다가 시와 소설을 좋아하는 공통점 때문에 함께 문학 강의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 당시에 나는 시 보다는 소설을 더 좋아했었어.  




해지고 어두워지자

산도 그만 문을 닫는다

나무들은 이파리 속의 집으로 들어가고

큰 바위들도 팔베개를 하고

물소리 듣다 잠이 든다


어디선가 작은 버러지들 끝없이 바스락거리고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새들은 몇번씩 꿈을 고쳐 꾼다


커다란 어둠의 이불로 봉우리들을 덮어주고

숲에 들어가 쉬는 산을

별이 내려다보고 있다


저 별들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저항령 어둠속에서

나는 가슴이 시리도록 별을 쳐다본다



이상국 <산속에서의 하룻밤>




예산이 빠듯했기에 입석표를 사서 원주행 비둘기호를 탔다. 그리고 다시 동해선으로 기차를 갈아탔을거야. 원주에는 간현 유원지라는 아름다운 곳이 있어 잠시 들를까 고민도 했지만 당일에 정암사를 가야 했기 때문에 유혹을 뿌리쳐야 했다. 정선군 고한읍에 위치한 정암사까지는 제천과 영월을 지나야 하는 먼 길이었거든. 분명 무궁화호나 비둘기호를 탔을테니 5시간은 족히 걸렸을 거야.


정선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고한읍에 도착하니 이미 주위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우리는 일단 정암사 아래 산 속에서 야영을 하기로 결정했지. 고한읍으로 오는 고속버스 승객은 우리 세사람 뿐이었어. 오랜만에 젊은이들을 만난 버스 기사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정암사로 향한다고 하니 우리가 도착할 즈음에는 정암사로 가는 버스는 다 끊길거라고 알려주셨어. 아니나 다를까 정암사 가는 버스는 이미 끊겨있었고 택시를 타기에 우린 가난했지. 그런데 그 버스기사님이 자신의 프라이드 차량으로 우리를 정암사 입구까지 데려다 주신거야. 강원도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그 기사님 덕분에 강원도 사람들은 이후로도 두고두고 순박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고운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




어린 자식 앞세우고

아버지 제사 보러 가는 길


- 아버지 달이 자꾸 따라와요

- 내버려둬라

  달이 심심한 모양이다


우리 부자가 천방둑 은사시나무 이파리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솨르르솨르르 몸 씻어내는 소리 밟으며 쇠똥냄새 구수한 판갈이 아저씨네

마당을 지나 옛 이발소집 담을 돌아 가는데


아버짓적 그 달이 아직 따라오고 있었다.



이상국 <달이 자꾸 따라와요>




한 밤중에 정암사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절 아래쪽 너른 터에 텐트를 쳤다. 워낙 깜깜했기에 나는 손전등을 비추고 너희 두 남자가 힘을 합쳐 텐트를 쳤지. 손전등을 들고 서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 뒷 목의 잔털이 주뼛주뼛 섰더랬어. 꼭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날까봐...솔직히 귀신이 나타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깊은 산 중이었으니까. 조금 위로 오르면 정암사가 있고 또 든든한 두 남자가 있으니 그나마 덜 무서웠다. 여하튼 우리는 텐트에서 잠을 청했어. 꽤 오랜 시간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또 승용차도 탔었기에 많이 지쳐 있었지. 그런데 침낭을, 그러니까 덮을 이불을 오직 나만 가져 온거야. 나는 침낭의 지퍼를 다 열어서 이불처럼 펼쳤어. 이불 주인으로서 나는 당당히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누웠고 너희 두 녀석은 양쪽에서 이불을 반만 덮은채 잠을 청했지.


새벽 서너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텐트 주변으로 저걱저걱, 사박사박 걸음 소리가 들린 때가...






대문 사진: 수마노탑 탑신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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