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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Jun 18. 2023

Y, H, 그리고 강원도에게(중)

이상국, <집은 아직 따뜻하다>

자박. 자박. 조심스럽게 텐트 주위를 걷는 발자국 소리.


저 소리가 사람의 발걸음인지 짐승의 것인지 당시의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구분할 수 있을지언정 그게 무슨 소용이었겠니. 나는 누운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어. 내 숨소리가 텐트 밖으로 새어 나갈까 숨도 가만 쉬었고, 바스락 대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꼼짝 않고 있었단다. 너희 둘을 깨워 함께 밖을 나가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문득 당시에 최고로 인기 있던 M본부의 프로그램인 <이야기 속으로>가 딱 떠오르지 뭐니.


내가 이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저 텐트의 지퍼를 여는 순간 우리 셋은 <이야기 속으로>의 다음번 주인공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했지. 왜, 공포 영화를 보면 꼭 그러더라. 음산하고 무서운 순간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문을 열었다가 광기 어린 살인자나 무서운 악령에게 당하고 말잖아. 나는 다행히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발자국 소리는 계속 이어졌지만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잠을 청했어. 그리고 신기하게 어느 순간 잠이 들었어.


연한 하늘색의 얇은 하계 텐트라 아침의 어스름한 빛이 느껴진 나는 잠에서 깼다. 그런데 H 녀석이 심하게 덜덜덜 떨고 있는 거야. 정신도 못 차리고 말이야. 나는 얼른 Y 너를 깨웠어. 아무리 한 여름이어도 해발고도 700미터 강원도 산속의 밤은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진다는 걸 우리는 전혀 몰랐어. 찬 기운에 이불을 잘 덮지 못한 채 잠이 든 H는 지금 생각해 보니 일시적인 저체온증이 왔던 것 같아.


Y와 나, 우리 두 사람은 얼른 이불로 H의 몸을 꽁꽁 싸맸어. 그리고 둘이 동시에 양쪽에서 껴안았다. 떨림이 빨리 멈추길 바라면서. 이러다 정신을 잃을까 너무 겁났다. 한밤중 정체불명의 발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실존적 두려움이었달까. 다행히 H는 금방 안정을 찾고 잠이 들었어. 우리 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 H가 눈을 뜬 후 우리 세 사람은 아침으로 초코파이를 먹었던 것 같아. 초코파이를 먹으며 너희에게 발자국 들은 이야기하자 글쎄 Y 너도 들었다는 거야. 너도 나처럼 숨죽이며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는 이야기에 우리 모두 웃고 말았어. 그 밤의 해프닝은 두고두고 웃으며 말할 추억이 되었구나.





그렇게도 많이 캐냈는데도

우리나라 땅속에 아직 무진장 묻혀 있는 석탄처럼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

희망을 다 써버린 때는 없었다


그 불이

아주 오랫동안 세상의 밤을 밝히고

나라의 등을 따듯하게 해 주었는데

이제 사는 게 좀 번지르르해졌다고

아무도 불 캐던 사람들의 어둠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섭섭해서

우리는 폐석더미에 모여 앉아

머리를 깎았다

한번 깎인 머리털이 그렇듯

더 숱 많고 억세게 자라라고

실은 서로의 희망을 깎아주었다


우리가 아무리 퍼 써도

희망이 모자란 세상은 없었다




이상국, <희망에 대하여(사북에 가서)>





텐트를 걷고 우리는 정암사에 올랐다. 그리고 그토록 보고 싶던 수마노탑을 보았어. 우리 답사 코스에는 들어가지 않을 예정이지만 순전히 수마노탑이 보고 싶어 우리는 이 멀디 먼 고한까지 온 거야. 그리고 그 긴 여정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전탑 형식의 수마노탑은 이름처럼 아름다웠으니까. 수마노는 푸른 보석이라는 뜻으로 서해의 용왕이 신라의 고승 자장에게 수마노를 주며 자신을 위해 탑을 세워달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어. 실제로 이 탑은 석회암의 일종인 고회암으로 만들어졌는데 멀리서 보면 연한 비둘기색이 은은하게 돌고 있었다.


나는 지겹게 보아오던 3층 석탑과는 완전히 다른 모전석탑을 처음 보는지라 수마노탑에 흠뻑 반하고 말았다. 혹시 어느 시인이 수마노탑을 보고 시를 쓰지 않았을까... 한번 찾아보아야겠다. 만일 그런 시가 없다면 나라도 꼭 써야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드네.


사진을 찍고 우리 세 사람은 산을 내려왔어. 버스터미널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서둘러 다음 목적지인 동해로 향했다. 동해 바다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동해시에는 무릉계곡을 품은 천년고찰 삼화사가 있거든. 삼화사는 그 유명한 선덕여왕이 건립한 절이기도 해. 거의 1400년이나 된 절이라니, 생각만 해도 우린 두근거렸어. 삼화사는 앞서 본 정암사처럼 자장율사가 건립한 곳이야. 강원도의 사찰 곳곳에는 자장의 손길이 참 많이도 닿아 있다. 원효 못지않게 유명한 명승인데 대중에게는 그리 많이 알려진 승려는 아니기도 하다.


무릉계곡에서 잠시 신선놀음을 즐긴 우리는 산 안개가 아련하게 낀 삼화사로 향했어. 삼화사는 생각보다 규모도 크고 곳곳이 참 아름다운 절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다른데 있었어. 삼화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거든. 1400년이라는 세월을 견뎌 낸 석탑을 보니 그저 돌로 지은 건축물로 보이지 않았어. 나무든, 돌이든, 그 자리에서 천년 이상의 시간을 보낸 물상을 보면 어떤 경외심이 들어.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오래된 것만이 소유하는 기품이 있지.





낙타는 어디 있는지,

두통 때문에 엑스레이 단층촬영하던 날

덜컥, 덜컥하고 필름이 넘어갈 때마다

나는 내 마음의 모습이 궁금했다


남쪽에서 혹은 북쪽에서

전후 좌우에서 바라본

나의 해골산은 비어 있었다

거기에는 초목이 없었고

노래방도 없이 적막할 뿐

다만 등고선처럼 희미한 길들 과

정신의 집이 있었던지

푸르스름한 자국이 보였다


깨끗하군요 하며

연신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새파란 의사에게

내 영혼은 어디 있는지,

여기서 한 십리 서쪽으로 가면 무엇이 보이는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저 돌과 모래로 아름다운 사막 한가운데로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람 같은 게 보였다


낙타야

낙타야



이상국, 낙타를 찾아서(다시 동쪽으로 천리를 더 가면 호야산이라는 곳인데 초목이 자라지 않고 모래와 돌이 많다. <산해경>에서 인용)




동해바다를 옆에 끼고 우리는 호랑이 등허리 같은 강원도 해안을 타고 올라가 드디어 양양에 도착했다. 양양에는 들를 곳이 많아 하루 일정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웠어. 우리가 갈 곳은 선림원지, 진전사터, 그리고 낙산사. 낙산사는 양양의 해안가에 위치하고 선림원지와 진전사 터는 내륙으로 더 들어가야 하는 곳, 특히 선림원지는 양양에서도 더욱 깊은 곳, 미천골 계곡 초입에 위치해 우리는 우선 그곳으로 향했다.



선림원지는 양양 시내에서 무려 5시간 가까이 걸리는 산골 중의 산골이었지만 도저히 거를 수가 없었다. 절은 사라졌지만 선림원지에는 삼층석탑과 석등, 홍각선사 탑비와 승탑 등 국가 보물이 4개나 있는 곳이었거든.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 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이상국,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선림원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어. 벌써 24년 전 일이니 내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은 없었고 종이로 된 지도만으로 그곳을 찾아가야 했어. 산길과 밭을 지나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혹시나 발 밑에 뱀이 나오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하며 강원도의 오지를 걸었다. 신라 후기인 9세기 이전에 지어진 선림원은 900년경 산사태로 무너지고 1985년에 절의 본당인 금당터가 발견되었어. 2018년에 금동불, 풍경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니 지금은 선림원지 가는 길이 그때보다 잘 닦여 있을지도.





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죽기 비틀어 쥐고 양양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년이 가고 다시 남을 세월이

몇 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 채는

아직 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울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들이 지천인데

경전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말이 많았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백날을 뒹군 들 네 마음이 절간이라고

선림은 등을 떼밀며 문을 닫는데

깨어진 부도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같은 햇살이나 몇 됫박 얻어 쓰고

나는 저 세간의 무림으로 돌아가네



이상국, <址(선림원지)에 가서>




과연, 선림원지의 보물들은 먼 발걸음이 수고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경이롭더라. 작지만 하단부에 섬세한 부조가 새겨져 있던 삼층석탑과 3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등하며 천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보존도 잘 되어 있었어. 저것이 광물의 힘일까. 생명이 없기에 오히려 수명도 없는 긴 돌에 사람들이 새기고자 했던 간절한 신앙. 천년 후의 인간에까지 그들이 새겨놓은 예술과 신앙이 전해지고 있으니 생물과 광물은 서로를 떼려야 뗄 수 없는 우주의 구성요소다.


버스를 다섯 시간 타고 한 시간 가까이 걸어서 이곳에 왔지만 답사한 시간은 불과 30여분. 허탈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다음 목적지가 있기에 또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동해에서처럼 우리는 양양 시내에서 버스터미널과 가까운 초등학교를 찾았다. 방학 중인 초등학교의 모래밭만큼 텐트 치기 좋은 곳은 없었거든. 너희 둘은 텐트를 치고, 나는 가져온 쌀을 씻어 얼른 밥을 지었다. 반찬은 슈퍼마켓에서 산 김치와 참치 통조림이 전부였지만 그 마저도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우리는 매일밤 텐트에서 그날 돌았던 장소를 답사장소에 넣을지, 숙박 장소로 적당한지, 식당은 좋았는지 등을 평가하고 다음날 일정을 짰다. 그리고 일찍 잠에 들었지. 하루하루 고된 일정이었거든. 마땅히 씻을 곳이 없어서 우리 몸에서는 점점 쉰내가 나기 시작했어. 공중 화장실이나 학교 운동장 수돗가에서 간단히 씻기는 했지만 샤워를 못했기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꼬질꼬질해졌지. 우린 하루 한 끼만큼은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한 번은 식당 주인이 우리 보고 군인들한테서 나는 쉰내가 난다고 해서 우리도 식당 주인도 깔깔 웃었어.


그런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고 빛나는 우리는 청춘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대학생들에게 강원도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넉넉하게 반겨주었으니까.  <다음 편으로 계속>






대문 사진: 선림원지 삼층석탑(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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