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은 Oct 17. 2023

비릿한 사랑의 포말에 관하여

이혜미 시인, <보라의 바깥>

여자는 모두 인어공주의 후손이라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해.  인어왕자는 좀 어감이 우습기도 하고... 상상이 잘 가질 않아.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잖아. 왜 사랑에 빠진다고 표현할까. 마치 물에 빠진다와 비슷하게 말이야. 사랑도 본질은 물의 속성을 가져서 그럴까? 


단단한 바닥이 있는 육지와 달리 물에 빠지면 바닥을 디디지 못해 허우적거리게 되지. 수영을 잘하면 물론 허우적거릴 일은 없겠지만 무엇이든 처음은 있게 마련이니까. 수영을 잘하는 사람도 처음부터 수영을 잘한 것은 아니니까. 


사랑도 그래. 배운 적이 없으니 처음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허우적대기 마련이야. 감정이란 깊은 바다와 같아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품고 있어서 나를 압도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겪게 되면 처음에는 덜컥 겁이 나지. 풍덩 빠지고 나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될까 봐. 


그런데 인어공주는 아예 물속에서 숨을 쉬고 사는 존재잖아. 인어공주야말로 사랑의 화신이라는 은유일까? 온전하게 사랑 속으로 빠져 들어가 그 속에서 살 수 있도록 진화한 존재... 어류니까 진화론상으로는 포유류보다 먼저였으니... 사랑의 관점에서 인간은 오히려 퇴행한 종족인가?


인어공주의 사랑은 비린내가 날 거야. 그녀의 머리에서는 해초의 향기가 날 것이고, 그녀의 반짝이는 비늘에는 바닷고기 특유의 비린향이 묻어 있겠지. 


그녀와 키스를 하면 축축하고 비리고 또... 짠맛이 나겠지? 이런 상상을 하는 나를 보고 너는 변태라고 생각할까? 



물의 요일에, 창문으로 떠오르는 낯선 사람들을 소매 끝

으로 문질러 지운다 방울져 떨어지는 얼굴들, 긴 여행에 지

친 바람이 도착하고 다시 떠나갔다 바다 위로 포말처럼 떠

다니는 이곳은 선상여관, 쓰여지지 않은 파도들이 몸을 떠는

곳 거품뿐인 맥주를 마시며, 나는 나에게 굳이 건배하지

않았다


둘러보면 온통 난파된 바람들, 영혼을 버리러 떠나는 사

람들뿐이었다 조각배를 버리고 흠뻑 젖은 채 구조된 두루마리

속 이름들은 모두 한 움큼의 가명이었고 ... 중략...


바다를 어쩌지 못하여 몸이 범람하는 날도 있었다 투숙객들은

그것을 멀미라 불렀지만 나는 그 울렁임을 인어의 시간이라 

불렀다 바다와 인간 사이에서 일렁이는 시간들...생략...


이혜미 <인어의 시간>중에서




사랑은 관념이면서 행위이고 행위이면서 관념이지. 눈에 보이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아. 알고 있으니 마치 눈에 보이듯 선명할 뿐, 실은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야. 마치 자외선처럼.


'보라의 바깥'이라는 시집의 제목을 보고 한참 고민했어. 도대체 보라의 바깥이 무어란 말인가? 보라라는 여자의 바깥을 말하나? 보라색의 바깥에는 다른 색이 있나?



눈 마주쳤을 때

너는 거기 없었다


이혜미 <보라의 바깥> 중에서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만 인간은 볼 수 있지. 세상의 총천연색은 그 빛들의 반사광일 뿐.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체라고, 진실이라고 말하기는 참 어려워. 가시광선 옆에는 자외선과 적외선이 있고,  엑스선과 감마선도 있고...


그래서 나는 조금 힌트를 얻었다. 이 어렵디 어려운 시인의 세계를 간신히 따라잡을 힌트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시인이 노래하는 것들을...




어떤 문장들은 사라지기 위해 태어납니다 얼어버린 소리

속에 과거를 담그고 환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의 미욱한

음절들은 수줍게 비약 속으로 숨어듭니다 광물의 조흔색을

흉내내며 당신 살에 얼굴을 부비면, 나에게서 조난당한 탄

흔들이 당신에게로 쏟아져내릴까요 이 문장을 더듬어볼 당신

눈동자를 떠올리면 심장의 뒤편이 수지류 수목들로 울창해

집니다 흔적, 오직 흔적을 남기고 떠나기 위해 먼 나라의

기후들은 닫힌 당신의 창가에서 밤새 정처 없습니다.


살얼음 낀 눈으로, 겨울은 창 너머 순하게 낡아가는 구름

들을 채록하는 중입니다 발자국들이 자신이 가진 지평선을 

가만히 들었다가 흩트리는 지금, 냉해 입은 식물의 어두운 

뿌리가 되어 문장들 속으로 저물어가고 싶습니다 파충의

보호색처럼 온몸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일을 우리는 평생에

걸쳐 연습해야 할 테니까요 다만 잊혀지지 않기 위해, 오래

도록 흐르고 또 얼어야 합니다


그러니 아직 문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빛의 단도가 흐리고

모호했던 당신의 꿈속을 난도질할 때, 이 문장들을 녹이고 

부수어 그 붉은 담즙으로 사라지려는 당신의 눈을 씻어야겠

습니다 나에게서 당신에게로 떠나가는 기억들을 위해, 또

어떤 문장들은


이혜미 <얼음편지> 




이 시를 읽자마자 인어공주를 떠올렸어. 왕자의 심장을 칼로 꽂고 그 피로 다리를 적셔야만 다시 인어로 돌아온다는 비정한 저주풀이를 들은 인어공주는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지 이 시를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생각해 보았지. 


내가 그녀였다면 내 심장을 즉각 차가운 얼음으로 만들어 가차 없이 나를 배신한 그의 심장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뚫어버렸을 텐데... 그러니 저 얼음편지는 분명 나를 떠나간 사랑에게 피로 쓴 고백일 것이야. 그와 나의 사랑이 끝이 나는 것이 마치 사라지는 문장 같을 테니까.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는 이의 마음은 울창한 숲 속의 이끼처럼 보잘것없이 땅에 들러붙어 있을 테지. 냉해 입은 식물의 뿌리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끈질기게 이어가는 사랑... 은 곧 고통이라는 단어로 치환되어 버릴 테지. 


그 사람은 정녕 있었던 것일까. 그의 마음은 내 마음과 교집합 된 적이 있었던 것일까. 동물인 우리는 그저 서로의 은밀한 속살을 비비던 때만 하나였을까. 




세계의 이부자리가 검은 물로 흥건하다 사라진 너는

온전히 나만의 것, 잠시의 진동과 마찰이 우리를 간신히

두 사람이게 했을 뿐


이혜미 <사라질 권리> 중에서



하지만 서로의 몸을 나누는 것 또한 사랑이란 걸 부인할 수는 없겠지. 시인은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해. 우리는 그저 '섹스' 혹은 '성교'라고 단답형으로만 답하는 단어 너머에 있는 진실을 시인은 기어이 포착해내고 만다. 이럴 때면 시인은 과학자가 되는 거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외선의 존재를 알려주듯, 섹스 안에는 분명 사랑이 존재한다고. 그것은 마치 한 사람의 물관을 다른 사람의 몸에 심는 것과 같은 거라고. 




그가 물관을 꺼내 내 손금에 심어주었네 비취, 입술을 오므리면

먼 나라의 푸른 돌을 불러 윗입술부터 차오르는 바다, 그 출렁이는

숨을 당겨 맡으면 차갑고 청록의 것들이 부드럽게 밀려들어

단단한 심장을 쓸고 지나갔네 뜨거운 입김도 없이, 살얼음으로 짠

구름을 나누어 덮고 우리는 서로의 속을 궁금해하다 잠들었지


이혜미 <비취> 중에서




대부분의 문학작품에서는 섹스를 불로 표현한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에서는 두 주인공이 마침내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섹스를 하게 될 때 남자는 성냥이 되어 전소하고 말지. 영화 <타이타닉>의 정사 장면에서 차창에 찍힌 여주인공이 손자국 묘사를 생각해 봐. 뜨거운 입김과 헐떡이는 숨소리들...


그런데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작가인 로렌스가 오르가슴을 어떻게 묘사했는 줄 알아? 남자인 작가는 어떻게 채털리 부인의 절정을 밀물과 썰물로 묘사할 생각을 다 했을까. 감탄을 하며 읽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본 중 최고의 성애 묘사는 바로 이혜미 시인의 <측백 그늘>이야. 




너는 해초마냥 나를 휘감았네 내 머리카락도 천 개의 손이

되어 너와 얽혀들었지 손가락 사이로 푸른 비늘 출렁이는데,

이끼 덮인 너의 몸은 요동치는 한 마리 물고기였네


한 욕조에 든 것처럼 비린 그늘 쏟아졌다 먹먹하게 헐떡이는

너의 아가미가 밀려들어오면 바다, 그 물비늘들이 끝내 나를

눈멀게 했다 엎질러진 그림자들 황급히 주워담으며 자꾸만

늑골 어디쯤이 흥건했는데 아아 네 속에 들어 이제 반만 처녀인

나를 어쩌면 좋을까 눈부신 모습 뒤로 습한 그늘을 숨기는 

습관은 너에게 배운 것이어서 감당하지 못할 살만 골라

사랑했던가 수맥의 흐름 속으로 콸콸 흐르고 싶은 내가 또

네가 아찔했다 고단한 뿌리를 움찔거리는 너, 그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치명


너의 비릿한 아가미 속에 들던 날, 이제 그만

나를 모른 체하고 싶었네


이혜미 <측백 그늘> 




향긋하면서도 비릿한 초록내음이 나는 측백나무 아래에서 시인은 촘촘하게 얽힌 가지들을 보았겠지. 측백의 무늬들이 마치 물고기의 비늘처럼 보였겠지. 그늘에 반만 몸이 가려진 시인은 이제 그늘과 사랑한다. 하필이면 실체가 확실한 측백이 아니라 그늘과 사랑한 것일까. 한때는 나무처럼 싱그럽던 그 사람이 이제는 그림자만 남긴 탓일까.


그녀의 시 속에는 왜 비릿한 어류와 사랑의 포말들이 가득할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애당초 어류였으니까. 두 다리가 생겨나 바닷속에서 육지로 걸어 나오기 전까지 모든 생명은 어류였다. 뱃속에 이제 막 생긴 작은 생명체를 봐. 그것은 마치 작은 송사리처럼 보이니까. 


애당초 생명은 물에서 시작했다. 물에서 시작한 생명들이 하는 사랑의 속성이 물을 어찌 떠날까. 




없는 네가 가장 아름답다

...중략...


너의 입술을 만지는 일은 세로로 여닫힌 괄호를 더듬는 일 같았다

네 생에 조금 관여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얼음을 꽉 쥐면 슬픔에서 

뜨뜻미지근한 물이 흘러나온다 너는 천천히 젖어간다

왜 돌아가는가, 물어볼 적마다 꿈의 언저리에서 자꾸만 두 발이 

굳어갔다 수은이 흐르는 강을 건너며

...중략...


휘발하는 것만이 우리의 경전이다

네가 선물해준 거울은 아름다웠으나

아무리 닦아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혜미 <제3통증>중에서




사랑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 사람의 한 생애를 모두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의 침묵 속에서 콘텍스트를 찾아 읽고, 그의 냉랭함 속에서 온기가 남은 슬픔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남는 것은 아무리 닦아도 그 사랑이 잘 떠오르지 않는 망각만이 선물처럼 남는 것이다.


그녀의 시를 읽으며 시인 이상 이후로 천재라는 생각이 드는 시인은 처음이었어. 시를 조금 끄적거리던 나로서는 그녀의 시를 읽고 뭐부터 할 수 있었겠니. 한숨만 푹푹 쉬고, 타고난 천재를 시샘하고 부러워할 뿐. 하지만 동시에 황홀했어. 시를 읽으며 황홀하다니...


듣도 보도 못한 시어들이 팔딱거리며 살아 있어서 바다향이 나고 비린내가 절로 시에서 풍겼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아름다워 충격이었어. 달콤한 솜사탕 같은 사랑 말고, 햇볕처럼 바싹바싹 뽀송하게 마른 사랑 말고, 오염 하나 없이 맑은 하늘 같은 사랑 말고, 추적거리고 흐느적거리고 휘감기고 비릿하고 습한 그런 사랑도 있다는 걸 선언적인 시어가 아니라 감추고 흘리고 홀리는 시어를 쓰는 시인은 이제 과학자가 아니다. 


시인은 연금술사 같기도 하고 마녀 같기도 해서 내게는 도통 요망할 뿐이다. 






대문 이미지: 구스타프 클림트 <물뱀>

이전 16화 <별 헤는 밤>을 들려주고 싶은 그대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