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나의 반성문이 될 편지글
이것은 아이에게 보여 줄 편지글이 아니다. 미래에 만나게 될 나의 아이를 생각하며 편지를 써 내려가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 것들을 하나의 글로써 정리해 보고자 목록의 한 귀퉁이를 빌린 것이다.
우선은 아이에게 드는 기본적인 감정이 ‘미안함’이라는 것이다. 부모는 곧 죄인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 믿게 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렇게까지 미안한 마음이 들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이 세상에 나게 하는 것부터 그 아이의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조건 그 아이만의 인생을 살아가야만 한다.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켰으므로 부모는 그 생명에 대한 책임을 걸고, 사회의 일원으로 키워낼 수 있어야 한다. 아이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지내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엄마’라는 이름을 걸고, 그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며 한 아이를 책임질 수 있을까? 감히 자신 있게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건 진정 ‘엄마’의 자리를 모르고서 하는 섣부른 대답일 것이다.
내가 아이에게 편지를 쓰면서 가장 많이 썼던 단어는 ‘욕심’이었다. 때문에 부모가 되는 순간부터 죄인이 되는 동시에 욕심쟁이가 될 것이라 느꼈다. 사람이란 역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너에게 이 만큼은 해 줄 테니 너도 그만큼은 보여주어야 한다,라고 나도 모르게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라곤 했다. 편지를 쓰는 내내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당장 아이가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도 신기했다. 물론 그만큼 ‘엄마’의 자리에 나 자신을 이입할 수 있어야만 했다.
아이에게 얼마만큼 솔직해야 하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엄마로서 이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주겠다며 잔뜩 꾸며낸 모습만을 보여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너무 인간적인 나의 본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아이의 환상(?)과 동심을 깨트릴 것 같았다.
솔직히는 편지글에 쓴 내용을
아이에게 그대로 실천할 자신도 없었다.
정말, 저 편지글은 훗날
나의 반성문으로 읽힐 것이 분명했다.
읽고, 또 읽으면서 도를 닦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육아지침들이 있다. 그중에서 나의 아이에게 맞는 지침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직접 아이들을 겪어본 바로는, 본문에서 썼던 것처럼 아이들은 생각만큼 그렇게 표로 나누듯이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만나게 될 아이가 어떤 성격을 지닐 것이며,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할지에 따라서 그 아이를 대하는 방식과 최선의 방법을 찾아나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미안함이 점점 더 커져갈 것 같다. 그렇다고 죄책감에 시달리겠다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누구든지 엄마가 되어보지 않아서, 처음에는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절대, 절대 죄책감을 갖지는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겠다.
이미 ‘엄마’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했다는 것부터 마음이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아이를 낳고, 기르게 된다면 자연히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이런 마음가짐일 때 아이를 대하겠다고 다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너를 선택했어.
너를 선택하기 위해 나의 무언가를 포기했어, 가 아닌 바로 내가 너를 선택했다, 딱 그뿐일 때. 그럴 때라야 온전히 나의 아이를 품어 안을 수 있고, 있는 그대로만을 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탓하는 부모가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부모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된 아이더라도 탓할 수가 없는데 나의 뜻으로 만난 아이를 어찌 탓할 수가 있을까!
미래에 만나게 될 나의 아이에게 편지를 쓰면서 또 한 가지 처절하게 느낀 것은, 나는 아직 많이 어리다는 것이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분명 무언가가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정확히는 알 수가 없지만, 다만 느낌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아직은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아서 마음대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지금 내가 마음먹은 것은 아이를 대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면 충분히 아이를 대할 수 있고,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가짐과 아이를 키워야 하는 현실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라야 충분한 준비를 마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이를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안다. 이미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 않은가? 한 아이를 책임지고, 사랑하는 과정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존경스럽다. 그와 동시에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적어도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지, 매번 마음을 먹는다. 조금이라도 더 진지하게 생각하며, 엄마가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되새긴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쉽게 전해 들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인터넷 기사나 sns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많은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력 단절, 육아 스트레스, 시댁 식구들과의 갈등……. 나처럼 미혼인 여자들은 저런 단어들을 접하면서 불안을 느낀다. 그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아이를 낳지 않겠다거나 결혼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나 또한 그렇게 마음먹었던 적이 있다. 아이를 키우느라 나의 커리어가 단절될 수 있고, 세련되고 예쁘게 꾸밀 수 있는 것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내가 그래도 아이를 키워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오로지 ‘아이’만이 주는 기쁨과 깨달음이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이를 키우며 또 한 번 세상을 달리 보게 되고, 나를 키운 부모님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나의 가정을 가지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확신을 갖기 위해서 훗날 나의 아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미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나는 조금 더 자라났지만 ‘엄마’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을 때, 그때에는 또 얼마만큼 자라날 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 어찌 되었든, 나는 언젠가 나의 아이를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아이를 사랑으로 보듬으며 현명하고 강단 있는 엄마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선생님의 상상육아>는 후속작 <선생님의 현실육아>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저희는 아파트 입주예정일에 맞춰 26년 하반기에 결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후 아기천사가 금방 찾아와 주길 바라며..
이 브런치북을 끝마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