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 + 미국 육아, 두 마리 토끼 잡기
드디어 대학원 봄학기 성적이 나오는 날. 대충 내 점수를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가슴 쫄깃한 기분으로 하루의 문을 연다. 최종 발표 시간까지는 꽤나 남았는데도 자꾸만 학교 웹사이트를 들락날락거리며 호들갑 떨기. 대학교 학부를 졸업한 지 1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알파벳 몇 글자로 매겨지는 내 넉 달치의 행적은 늘 나를 들썽거리게 만들더라. 기대했던 알파벳이 찍히면 '나 열심히 살긴 살았구나?' 뿌듯한 기분에 들썩. 반대로, 내가 생각했던 알파벳과 다른 활자가 찍히면 교수님에 대한 괜한 원망과 스스로의 노력에 대한 억울한 심경에 털썩. 두근두근. 이번엔 과연? 휴... 다행이다. 이번에도 모두 A.
무슨 대학원을 고3처럼 다녀.
목숨 걸고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아도 될 타임라인을 살고 있다. 학부 졸업 이후 일찌감치, 바지런히 일을 시작한 덕분에 10년 차 남짓의 방송 경력을 찍고 나름대로 '졸업'을 선포한 시점이니까. 대학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처럼 뜨겁게 몰두할 필요는 없었다. 고3 수험생처럼 절실하게 특정 성취를 갈구해야 할 시점도 아님은 분명했다. A 안 받고 B 받았다고 해서 다가올 미래가 엉망진창으로 틀어질 리는 없었으니까. 오히려 10년을 일했으니 이젠 잠시나마 나만의 안식년을 추구해도 될 만한 시점 아닐지... 가끔은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 난 정반대로 가고 있다. 퇴사 직전까지 미국 유학 준비한다며 고3 시절보다 아낌없이 불태우며 살았고, 퇴사와 결혼 이후 미국대학원에 진학해 서른넷 늦깎이 유학생 신분, 그 고단함을 은근슬쩍 즐기는 중이니까. 지난 한 해부터 임신과 출산, 육아와 공부 네 마리 토끼 잡는 중. 열이면 아홉, "넌 좀 쉬어가도 된다"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내 몸과 마음을 좀처럼 가만히 내버려 두게 되질 않더라. 자꾸만 날 재우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아주 좀 더 뭔가를 이뤄내야 해.
난 엄마니까.
가만히 있는 건 싫었다. 좀 더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은 구름처럼 자꾸만 부풀어올랐다. 임신과 출산 과정 속에서 더더욱이 말이다. 너무나 소중한 존재를 품고 보듬는 귀한 기간이지만, 그 기간이 자칫 본인도 모르는 사이 인생의 '정체구간'처럼 변질될까 봐 공포스러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을 품는 시간이 자칫 내 생명력을 잃게 되는 시간이 될까 봐 조마조마했던 걸까.
인생이란 우여곡절의 곡선을 품는 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하강곡선을 그릴지도 모를 '내일'의 날들을 쉽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다녀도 적당한 성적은 나올 테고 적당히 졸업가운이야 입게 될 테지만 그렇게 적당히 지내다간 내가 정말 적당한 지점에서 멈춰버리게 될까봐 무서웠다. “원래 엄마가 되면 그런 법이야. 다들 그렇게 살아.” 이런 격려의 말에 온순하게 날 길들이긴 싫다. 결국 난 좀 '지나치게' 달리고 있었다.
적당히 멈춰 서기는 싫어.
내 인생의 정체구간을 만들고 싶지 않거든.
꽤나 '무리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시험기간에 새벽 서너 시까지 깨어 전공 원서를 읽던 날들.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너무 고생했나 싶을 땐 뱃속 아기에게 무한 사과하며 반성했던 나날들. 그럼에도 내 '공부'를 놓치기는 싫은 마음은 여전했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엄마로 자라나고 있는 걸까. 뱃속 아기는 편안히 쉬고 싶다는데, 태어난 아기는 엄마랑 마냥 딩굴딩굴 놀고 싶다는 데 난 자꾸 꼬부랑글씨 가득 찬 노트북 화면만 쳐다보려는 걸까.
하루 24시간을 아기랑 충분히 여유 부리며 보내도 모자랄 상황에 난 자꾸만 '내 시간'을 쓰겠다고, '내 공부'를 위해 활용하겠다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건지 몇 번씩 되묻는다. 그렇다면 내 욕심은 결국 내 삶에, 아기의 하루하루에 해를 가하고 말 것인가. 과연 부정적이기만 한 것인가. 때론 어떤 욕구가 단순히 욕심이 아니라 삶을 좀 더 낫게 만드는 선한 욕망으로 작용하기도 하지 않던가.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들이다.
네가 성장할수록
엄마도 성장하고 싶어
결국 출산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 난 대학원 여름학기를 등록했다.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전공 중에서도 특히 듣고 싶었던 과목. Branding & Social Responsibility. 개강은 바로 다음 주 월요일. 출산한 뒤 5월 18일은 한참 뒤에나 찾아올 줄 알았는데 금방 코앞 지점이 되어버렸네. 물론 등교를 위해 보스턴 도심까지 통학해야 하는 대면 수업이 아니라서 가능한 일이다. (2020년 5월 현재까지도 미국의 혹독한 코로나 시국 속에서 매사추세즈 주 내 대학교의 모든 강의는 아직 온라인 수업으로만 진행되고 있는 중.)
“아기가 어려서 힘들 텐데... 아기 수유 텀, 수면 텀 속에서 네 공부 챙기기는 건 불가능할 걸?" 주변의 우려 섞인 목소리가 많았지만 난 결국 모든 걱정을 한 귀로 흘려듣기로 작정했다. 뭐, 출산하고 나서 며칠 뒤 온라인 강의 출석도 해봤지만 무릎에 아기를 눕혀두고 살살 토닥토닥하며 조심조심 몸을 놀리면 못할 것도 없겠더라. 아기의 맘마 타임에 전자책으로 관련 전공 논문들을 탐독하고, 아기의 수면 타임에 얼른 페이퍼를 쓰면 되겠다고 어설피 계산을 마쳐두었다. 될지 안 될지는 일단 두고 볼 일.
경력 단절녀는 아니야
경력 증폭녀를 꿈꾸고 있단다
어른이 된 자녀가 둥지를 떠나고 나면 허전한 부모는 '빈 둥지 증후군'을 떠안는다고들 한다. 고이고이 품었던 나만의 베이비가 내 곁에서 멀어지면 결국 품고 있던 시간이 다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영영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아서 속상하다는 이야기가 여섯 글자 뒤로 쓱 흐른다.
아기가 내 둥지에서 날갯짓으로 멀어져 갈 때 둥지를 마냥 비워두고 아쉬운 세월을 탓하긴 싫다. 나 역시 다른 방향성을 품고 의미 있는 날갯짓을 하고 싶다. 아기가 배냇짓을 하며 잠들어 있을 때 나도 함께 잠들어있는 삶은 있는 힘껏 외면하고 싶다. (다행히 나는 잠이 없는 편이다. 참 다행이다.) 눈이 뻐근하고 머리가 아려도 전공서적을 펼쳐 들고 오후 내내 읽고 또 읽어나갈 작정. 이래저래 자꾸 내 학습 근육을 두드리고 확장시키면서 '잠깐 멈춤'을 거부해 나갈 생각. 이 순간만큼은 내 커리어가 댕강 잘려나가는 순간이 아님을 재차 믿어보며... 지금의 공부가 내 경력과 지금까지 삶의 노력 뭉치들을 결국 커다랗게 증폭시킬 거라고 믿어보며.
그래서 엄마는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해. 살랑살랑 산책과 달곰한 과자가 주는 위로 못지않게 이 또한 나에게 비교불가 힐링 포인트를 선물해줄 테니까. 올에이 찍은 성적표 속에서 내 가치를 찾고 발전 가능성을 자꾸만 내다보고 싶은 거니까. 이 모든 게 소소한 활력소가 되니까.
경단녀가 아니라 경력 증폭녀를 꿈꾸고 있어. ‘공부' 순간들을 통해 여기 자리하고 있는 엄마, 나 자신을 커다랗게 부풀려 나가기를 희망하니까. 너로 인해 잠시 멈춰 선 것만 같은 하루를 통탄하기보다는 너와 함께 걷고 성장하는 하루를 꿈꿀 거거든. 빈 둥지 증후군이 아니라 또 다른 둥지 찾기 신드롬이 내 삶의 화제의 키워드가 될 거라서 기대돼. 나의 오늘 나의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