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BA하는 아나운서 Jul 09. 2020

나의 ‘마흔’ 만들기

미국 유학 + 미국 육아, 두 마리 토끼 잡기


장미꽃을 선물 받은 뒤엔 어김없이 같은 고민을 하곤 한다. 물주머니를 과감히 빼고 꽃을 말리기 시작할 것인가, 물속에 가지런히 담가 지금의 상태가 최대한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게 애쓸 것인가. 선물 받을 때 그 활짝 핀 자태는 너무도 아름다운데 그 이후 '장미의 삶'을 어떻게 유도할 것인지 결정짓지 못해 하루 정도 고민한 적이 다반사다. 촉촉한 물기를 좀 더 머금고 있게 놔두면, 꽃의 전성기, 그 아름다운 자태를 좀 더 느릿느릿 감상할 시간이 확보된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고혹적이고 우아하게 시들어감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 반대로 물기를 쫙 뺀 뒤 말리다 보면 바삭바삭한 질감을 끌어안고 마치 새로운 꽃이 된 것마냥 '드라이플라워'의 새 삶을 선물할 수 있다. 촉촉한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게 살짝 아쉽긴 하지만...

활짝 핀 꽃, 만개 이후엔 어떤 몸짓으로 자리하는 게 좋을까.


장미꽃의 만개, 그 이후 삶을 결정짓는 과정은 마치 마흔 이후의 시간을 고민하는 것과도 닮았다. 최대한 촉촉하게 현상 유지 오래오래 하도록 보살필 것인지, 또 다른 질감을 지닌, 전혀 다른 자태로 살아가도록 결단할 것인지.  


"이러다가 금방 마흔 되겠네?"

육아를 하다 보니 시간이 앞으로 가고 있는지, 뒤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는 요즘. 달력 앱으로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의식적으로 확인해두지 않으면 도무지 날짜 요일 감각을 붙잡지 못하겠는 정도니, 시간이 정말 빨리 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한국이 아닌 타국에서 100일을 곧 앞둔 아기 키우기. 여전히 낯선 점 투성이인 미국에서의 일상생활과 대학원 적응, 거기에 육아가 겹쳐지니 1분 1초가 두세 배의 속도는 더 빠르게 휙 휙 달아나버리는 느낌이랄까. 괜한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나이를 잊고'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 나이를 물을 때 1,2초 잠시 망설였던 걸 고려해보면 이러다가 진짜 눈 깜짝할 사이, 서른여섯 되고, 서른여덟 되고, 마흔 되겠지 싶다. 아기를 재운 뒤 일명 '육아 퇴근' 후 남편과 나눈 대화의 한 토막.


우리가 지금 몇 살이지?
음... 35살.
한국 나이로?
응. 미국 나이로는 생일 지났으니 서른넷.
이러다가 금방 마흔 되겠네.


마흔. 아직은 굉장히 생경하지만 곧 친숙해지게 될 그 순간의 이름. 올해가 거의 다 지나가버렸다고 쿨하게 생각해버린다면, 결국 마흔까지는 고작 4년 정도 남은 셈이다. 지금 누워만 있는 아기가 그 순간엔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게 될 테고, 뽀얀 액체에만 매 순간 의존하고 있는 아기는 결국엔 나와 남편이 즐기는 음식까지 같이 공유하는 날들이 찾아오겠지.

결혼 7년 차, 남편과는 사랑을 넘어 전투애와 육아 동지애가 두터워져 갈 테고.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 '유학'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나 스스로 평가하는 날들이 찾아들고야 말 것이라는 것. 약 2년 간의 유학생활 끝에 학위를 따낸 이후, 나는 어떤 내일을 살고 있을까. 마흔의 7월 둘째 주 목요일, 나는 어떤 모습으로 '유학 그 이후의 삶'을 열어내고 있을까.


마흔. 인생 제2막을 열겠다고 다짐한 전환 지점. 흔들림 없는 정삼각형의 삶보다는 뒤틀린 변주, 예측 못한 각도가 만들 도형의 삶.




"마흔에 내 인생 제2막을 열거야."


2017년, 본격적으로 '미국 유학행'을 꿈꾸기 시작했던 이유. 마흔에 내 인생의 2막을 '짜잔' 시작하겠다는 것. 꿈에는 끝이 없는 것이었다. 학창 시절 그토록 되고 말 거라고 일기장에 적고 또 적었던 직업 '아나운서'. 그 이름표를 달면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라는 류의 결론으로 아름답게 내 인생 소설을 마감 지을 줄만 알았는데 소설의 결론은 여러 갈래의 길을 품고 있었다. 장미꽃 주인이 꽃의 운명을 결단하듯, 내가 갈 방향에 대해 고심해봐야 했다.


스물셋부터 지역 방송사의 메인뉴스 앵커를 맡았으니, 꼬박 내 20대와 30대가 뉴스 진행에 올곧이 집중되어 있던 셈. 메인 뉴스 진행과 회사의 메인 홍보물 내레이션, 라디오 메인 음악프로그램 진행과 시간대별 라디오 뉴스 진행. 여자 아나운서라는 정체성을 적절히 지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골고루 배정받아 불안할 것 없는 나날들을 살아내고 있었다. 어느 하나 일그러짐 없는 정삼각형의 시간들. 그러나 그 안정감과 균형감 가득한 도형의 시간은 더불어 내게 '독약'이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스몄다. 왜?


마흔이 되어도
내 삶은 똑같은 시간표로
돌아갈 것 같았으니까.
앞자리 숫자는 바뀌는데
이름표는 똑같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리하여 흔들림 없던 정삼각형은 일정한 균형감을 상실한 어설픈 마름모나 조금 뒤틀린 듯한 사다리꼴 류의 변형된 삶을 향해 걸어보기로 한다. 마흔에 새로운 막 열기 대작전. 또 다른 질감의 마흔을 맞기 위해선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아나운서 박수현'이 아닌 다른 이름표의 나로 서기 위해선 충분한 '공부'가 필요했고, 내가 원하는 그 '공부'를 하기 위해선 유학이 필요했고, 그 '유학'을 위해선 유학을 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흔을 준비해나간다는 것. 여러 가지 변수 속에서 나를 어디까지 확장해나갈지 고민하고 이래저래 부딪치며 시도해보는 것.


거 참 쉽지 않네. 마흔이라는 나이를 이토록 요란하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던가. 학창 시절부터 철저히 '내신형' 공부에만 집착해 왔던 내게는 실전 영어에 대한 자신감도 바닥이었고 토플 점수조차 없었으니 매 순간이 챌린지. 하지만 하고자 하는 마음만 버텨주면 못할 것도 없겠지.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과 같은 에너지로 '아나운서 그 이후'를 준비하자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마음먹지 않더라도 '마흔'은 찾아오고야 말 거다. 하지만 준비된 마흔을 맞이하고 싶은 30대 여자의 마음. 20대 30대의 연장선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 서 다른 이름표로 그 땅을 딛고 서고 싶다는 막연한 꿈. 그래서 시작된 고단한 유학생 라이프는 어제도 오늘도, 묵묵히 이어져가고 있다. 타국에서 마주하는 팬데믹 위험과 나날이 황당 지수를 키워가는 미국 비자 이슈들 속에서도 굳건히 씩씩하게 견뎌야 하는 이유이기도.



인생 2막 열기
드라이플라워가 되기를 결단한 삶



새로운 질감을 끌어안고 살아보겠다고 나선 지 어느덧 2년, 그리고 완전히 바삭바삭하게 잘 마른 '드라이플라워'의 시간까지 남은 약 5년의 시간. 나는 '마흔'의 오늘을 정확히 어떤 '질감'으로 살아내고 있을까. 나는 나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성공했을까. 아니면 이전에 머물렀던 상태를 일찍이 종료한 데 대해 내심 아쉬워하고 있을까. 내 마음에 쏙 드는 마흔을 맞이하려 퇴사와 유학이 교차하는 지점을 지나 도약을 기다리는 시기. 앞자리가 바뀌는 삶을 맞이한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드라이플라워'가 되기를 결단한 마흔 예비생, 새로운 질감의 꽃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애쓰는 그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장미의 인생, 그 2막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전 29화 엄마는 공부가 필요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