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덕후의 카페 사용 설명서
“나는 집 근처에 스타벅스만 있으면
어느 지역이든 상관없을 것 같아"
유학할 학교를 구체적으로 정하기 전, 남편과의 대화에서 나온 우스갯소리. 당시 남편은 올랜도에서 박사과정을 마쳐가고 있던 때였고 차후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여러 주의 대학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고 있었다. 남편이 어느 주에서 일할 지 결정하는 것에 따라 자연스레 우리의 신혼집 거주지가 결정될 터, 여기에 플러스. 내가 석사과정을 밟을 학교도 최종 결정해야 했다. 미국에 대한 경험치가 그저 뉴욕과 올랜도, 샌프란시스코 잠깐 여행 정도에 불과했던 나로서는 미 동부, 서부, 중부, 남부, 지역 각각에 대한 분위기 차도 잘 모르겠고 딱히 선호가 없던 시절이었다. 내 대답은 간결했다. 집 근처, 학교 근처에 별다방만 있으면야 뭐, 어디에서든 못 살 것도 없지. 다시 말해 역세권 말고 '스세권'이라면 어디든 오케이.
한 마디로 자칭 타칭 스타벅스 마니아. 아나운서로 근무하던 수년의 세월 동안 출근길 꼬박꼬박 별다방에 들러 초록 초록한 사이렌 콕 박힌 커피를 들고 회사로 향했다. 그래야 제대로 '힐링'받는 느낌, 출근할 '맛' 나는 하루가 열리는 듯했다. 강원도 기온이 영하 20도 아래로 내려가 모든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것 같고 그에 따른 서러움마저 얼어버릴 것 같은 날에도 따뜻한 별다방 라테 한 잔이면 언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덕분에 방송할 '맛'도 절로 쑥쑥 생겨나니 꽤나 괜찮은 자가 힐링법이었다.
일도 공부도 손에 안 잡혀서 몇 날 며칠을 무기력하게 질질 끌고 가는 듯한 일상을 살다가도 별다방 커피 한잔에 달콤한 디저트 냠냠거리면 그나마 원기가 살았다. 그 어떤 에너지 드링크보다 내게는 강력한 효과 있는 자양강장제였으니... 유학시절에도 이 집착은 자연히 계속될 수밖에. 학교 가는 길, 보스턴 곳곳의 스타벅스 위치를 자동 꿰고 부지런히 출석 체크하는 일상, 뭐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이 애착은 참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다.
왜 그렇게 좋은 거야. 그게?
때는 바야흐로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싶다. 18년 전, 고등학교 2학년 수험생 시절. 지금처럼 프랜차이즈 카페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더랬다. 독서실 자판기에서 파란색 캔커피 하나 '우르르, 똑' 뽑아 먹는 게 더 흔한 일상이었던 18살 무렵, 집 앞 고층 건물 안에 간이 테이블 몇 개가 쪼르르 놓인 별다방이 생겼다. 내가 첫 스타벅스를 마주하던 순간. 우아한 파마머리 여신이 큼지막하게 자리 잡은 그 '카페'라는 공간도 궁금했지만, 이 호기심에 불을 지핀 건 당시 인기 있던 시트콤의 반복적인 대사 한 마디. "캐러멜 마키아토 먹고 싶어" 카랑카랑하고 재기 발랄한 여대생을 연기했던 한예슬 씨의 캐릭터는 수험생활에 찌들어있던 예비 고3의 '커피 호기심'을 무럭무럭 키우기에 충분했다.
중요한 모의고사가 끝나면 한 잔, 고3 언니들의 수능시험날, 우리가 이제 사실상 고3이 되는 거라며 잔인한 축배를 들 겸 또 한 잔, 이렇게 참 조심조심 사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하던 대학교에 합격하고 그 대학교 앞 스타벅스에서 당당히 한 잔.
남편은 묻는다. 다른 카페도 이제 많아졌고, 더 고퀄의 원두를 자랑하는 카페들도 생겨나고 있는데 굳이 왜 스타벅스냐고. 한 개인이 별다방이라는 하나의 '기업'에 이렇게 충성하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인 거라고. 듣고 보니 '스타벅스 마니아'를 자처하는 나 스스로도 신기하다. 그러게... 나는 왜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나 미국 대학원에 입학해서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그 많은 커피숍을 두고 왜 굳이 '스타벅스' 바라기를 하고 있는 걸까. 누가 보면 지분이 있거나 협찬받는 줄 알겠다 싶을 정도로 이토록 좋아라 좋아라 하며 참새방앗간 들르듯 자주 찾는 걸까. 거의 모든 프로모션을 달달 꿰고 있으며 각양각색의 음료의 장단을 전공지식만큼이나 통찰력 있게 설명해줄 수 있는 능력을 쥐고 있는 걸까. 스타벅스 학과가 있다면 수석입학에 장학생 졸업할 수 있다고 자신할 만큼.
꿈에 다가서는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했기 때문이야
답에 대한 힌트는 은근슬쩍 앞에 흘려두었다. 커피의 맛은 그저 '쓴맛'이라고만 알고 있던 고교시절부터 이 공간에서 내 앞날에 대한 꿈을 심고 사부작사부작 틔워온 전력이 있기 때문. 열여덞 살 무렵, 당시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것만 같다고 생각한 거대한 모의고사 하나가 끝나고 나면 여리여리한 여대생이 논스톱 시트콤 안에서 늘 예찬하던 캐러멜 마키아토를 스스로에게 '선물'하듯이 마셨다. (마키아토가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그 이름, 어찌나 참 세련되고 예쁘다고 느껴지던지.) 선물같이 마신 커피에 대학생이 되는 꿈을 시럽처럼 살랑살랑 뿌리고 그 언젠간 방송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남몰래 은근슬쩍 그러나 야무지게 토핑을 덧댔다.
연고 없는 지역들에서 방송생활을 이어가면서도 각 지역의 별다방들은 또다시 꿈을 다지는 공간, 미래를 상상하는 공간으로 작용했다. 초록색 사이렌이 톡 박힌 종이컵을 들어 올리는 동시에 나의 내일들에 대한 생각들도 함께 마음 위로,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조금 더 나은 방송을 하고 싶다는 응집된 의지, 하루하루 안주하지 말고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그 사이 따뜻한 커피 안에 녹아내렸으리라. 에스프레소 샷에 부드러운 우유가 그라데이션 되듯이 부드럽게 천천히 보기 좋게.
그러다 보니 하나의 브랜드, 하나의 기업 그 이상의 대명사가 되어 내 일상에 뿌리내리게 된 게 아니었을지. 점점 다양한 커피, 새로운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새 카페가 생겨나도 자꾸만 18살 때부터 찾던 그 공간에 몸과 마음을 두는 게 아닐지.
읽을 책 한 권에
근처 별다방만 있다면 뭔들
유학생활에 더해 임신과 출산, 육아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요즘 같은 날들, 어쩌면 내 인생에서 평생 잊기 힘든 중요한 이벤트들이 큼지막하게 자리 잡은 올해라는 그래프 안에서 별다방의 초록초록 사이렌은 그 언제나와 같이 힐링 그 자체, 치유의 지표.
그곳 그 커피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예찬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시 한번 조곤조곤 속삭이겠다. 나에겐 커피 파는 곳 이상의 공간이라고. 꿈을 그리고, 점점 현실 안에 그 꿈을 녹여냈고, 과감히 지우고 새 그림 스케치를 해나가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함께 해준 공간이라서 더욱더 포기할 수가 없다고. 그렇기에 자꾸만 마음이 가라앉는 순간들에나 마음이 쉽게 엉성해지기 쉬운 날들에 촘촘한 에너지를 덧대고 싶다면 이곳을 자꾸 찾게 되는 거라고.
4.44달러. 보스턴 이곳에서 마주하는 오늘의 내 커피, 소이 라테 한 잔. 타국에서 가장 애정 하는 커피를 한 잔 테이크 아웃해 아기 잠든 시간을 틈타 생각을 정리하고 좋아하는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그 느낌! 아, 생각만 해도 상상만으로도 사랑스럽다. 대학 수업 과제에 지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타국에서 이리도 힘들게 공부를...' 마음이 들 무렵에 잔잔하게 힐링을 투여하는 따끈따끈한 마취제.
준비부터 만만치 않았던 유학생활에 그야말로 '스타벅스'마저 없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얼른 마쳐두고 커피 한 잔 소박하되 근사하게 '선물하듯이' 마셔줘야지. 오늘의 유학생 엄마 라이프도 참 수고했다고, 틈틈이 남편과 아들과 함께 꿈을 키워나가느라 고생한다고. 또 한 번 토닥토닥. 홀짝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