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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이 다른 남매 육아, 엄마의 힐링 모먼트

[29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by 마이 엘리뷰

#1.

신경다양성 아이를 키우고 있다. 겉으로 쓱 봐서는 별로 티가 나지 않지만 다섯 돌 넘은 아이 앞으로 발급된 장애인증명서가 있고, 장애인으로 일련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복지카드가 있다. 보행상 장애도 인정받아 아이와 함께 이동할 때는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할 수도 있다. 자폐성 장애로 진단받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그렇다. 외면적으로 표가 나지 않다 보니 그 누구도 '장애아'일 거라고 생각해두지 않지만 시간이 1분, 2분 흐르다 보면 '뭔가 특별한 애구나' 눈치챌 만한 구석들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가 10초 넘도록 '콩콩' 제자리 점프를 하는가 하면 반 플랫 높은 하이톤으로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티가 나지 않지만 또 티가 제법 나는 아이를 키워간다.


#2.

신경다양성 아이의 동생을 키우고 있다. 태어나던 날,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방영을 시작했고 그쯤 해서 오빠의 자폐스펙트럼 징후가 조금씩 짙어졌다. 둘째를 낳고 들어간 산후조리원에 챙겨간 단 한 권의 책도 자폐스펙트럼 아이를 육아하는 과정을 담은 에세이였다. 동생을 낳았는데 오빠에 대한 고민을 한껏 실은 책을 챙겼던 것. 둘째 아이 새벽수유를 챙기는 것보다 예민한 청각 때문에 한밤에 자주 깨서 소리를 지르던 첫째를 감싸안는 게 더 신경이 쓰였던 날들이었다. 태어난 지 3년이 지난 지금, 엄마 못지않게 오빠의 일탈행동에 잔소리하는 말발까지 섭렵해 가고 있는 둘째를 키워간다.



둘 키우는 여정
결이 너무 달라서요


사뭇 다른 두 아이를 키워가는 여정, 나는 이걸 '결이 다른 육아'라고 통칭하기로 했다. 첫째의 언어치료 상담을 받을 때나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 선생님과 일상 소소로운 이슈들을 이야기할 때면 나는 늘 '결'이라는 단어를 꺼내든다. "둘 키우는 게 결이 너무 달라서요." 18개월 무렵부터 공공연히 '느린 아이'라고 소개하곤 했던 첫째와 맥락에 맞는 언어발달력이 오빠를 넘어서는 둘째는 발달 속도뿐만 아니라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는 성향 하나하나가 매우 다르다. 첫째는 낯선 감각을 마주할 때마다 눈을 감거나 눈을 가리거나 귀를 막는 데 익숙한데 둘째는 "오빠야, 이리 와봐. 이거 우리 같이 해보자" 제안한다. 아이의 성장 발달이라는 게, 세상사에 대한 새로움을 맞닥뜨리고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핵심 아니던가.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스타일이 매우 다르니 당연히 자라나는 속도와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결이 너무 다르지만
하나 되는 순간은, 바로 '자연'


너무 다른 둘이 돌연 '하나'가 되는 비밀 키워드가 있다면? 바로 자연이었다. 한국과 미국, 나라를 불문하고 키즈카페나 쇼핑몰에 데려가면 달라도 너무 달랐던 둘. 그랬던 둘이 미국집 뒷마당을 만나면 두 눈 반짝이며 하나가 됐다.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마련한 집은 다름 아닌 '주택'이었는데 매력포인트는 마당에 있었다. 앞마당, 뒷마당으로 향하는 문만 열어놓으면 애들은 그야말로 자연인이 되어버렸던 시간들. 키즈카페에서의 2시간 제한 룰도 없고, 아이들 행동을 제약하는 따가운 시선도 없다 보니 남매의 표정이 밝아졌던 건 덤이다. 언어발달, 인지 발달, 각종 발달 카테고리의 성장 수준을 예리하게 따지자면 만 5세와 만 3세의 간극, 자폐 어린이와 그렇지 않은 동생의 격차는 큰 것이었는데 자연 속에서는 그냥 데굴데굴 보기 좋게 하나가 돼버렸다. 그 어떤 차이, 차별, 나이차, 성별차, 장애와 비장애의 차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 속을 뒹구는 아이들의 열렬한 반응 덕분에 덩달아 외출 횟수가 잦아졌던 건 안 비밀. 민들레 홀씨를 연신 '호호' 불어내면서 1분 1초 까르르 웃어대는 아이들 틈에 있노라니, 그 순간만큼은 엄마인 나마저도 힐링 파라다이스에 있는 느낌이었다. "이리 와, 그거 만지지 마, 하지 말랬지!" 잔소리 폭격기가 되어가던 나 자신을 유일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 더불어 장애, 비장애 남매를 구분하지 않을 수 있는 골든타임. '왜 둘이 이토록 다를까'에 대한 물음표를 두둥실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타이밍이 바로 이때였다. 둘은 똑같이 뛰고, 유사한 리듬감으로 몸을 흔들어대고, 잔디를 데굴데굴 구르고 싶어 하는 욕구 레벨도 비슷했으니까. 결이 닮아가는 순간, 공간의 힌트는 바로 자연, 결국 자연이었다.


얘들아,
이제 들어 가자
싫어요
참방참방 더 할래요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던 날, 집 근처 카페에 갔다 오는 길에 아이들이 도통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안 한다. 엊그제 샀던 레인부츠를 개시했더니, 신발에 물이 튀어도 '엄마에게 혼나지 않을 각'이라는 걸 터득한 듯, 쉼 없이 웅덩이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반복하는 남매. 아들의 신발은 한국 사이즈로 200cm, 딸은 170cm 정도였는데, 참방참방하겠다는 의지에는 30cm는커녕 3cm의 격차도 없는 듯했다. "얘들아, 이제 들어가자" 했더니 둘이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참방참방, 더 할래요"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한다. 첫째는 반플랫된 음색 담아 하이톤으로 힘을 주고, 둘째는 오빠에 비해 의성어, 의태어, 부사 활용력은 약할진대 오빠 말을 제법 근사하게 따라 한다. 신체연령도 다르고 발달패턴도 전혀 다른 두 아이가 하나 되어버리는 오늘의 비밀병기 역시 '빗방울'. 애둘 데리고 얼른 들어가서 씻기고 쉬어야겠는데, 또 '이토록 좋다는데' 못 이기는 척 흔쾌히 빗물웅덩이를 허락해 버리는 오후 되시겠다. 그래, 이런 게 바로 힐링이지!


장애아이와 비장애아이를 함께 키우는 마음은 그렇다. 결이 다른 아이, 참 반대되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만 같은데, 하나 되는 순간은 발견하는 재미로 버텨간다. 두 아이의 '하나' 모먼트를 찾아가는 여정을 촘촘히 이어가는 하루하루들. 오늘의 모범답안은 '자연'이었는데 내일의 비밀 키워드는 또 뭘까. 결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엄마의 힐링모먼트를 찾아간다. "얘들아, 근데 집에 들어가긴 들어가자"


참방참방,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자연 속 힐링
"얘들아, 우리 집에 들어가야하지 않을까?"



* 브런치북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는 1편과 2편, 총 33화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국행 이전, 신경다양성 이야기의 시작이 궁금하시다면 1편으로 놀러와주세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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