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뮤지엄 가자! 뮤지어엄! 뮤우지이어엄!!!"
우리집 신경다양성 아이는 같은 말 반복이 특기다. 하고 싶은 게 있거나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한 두 번 힘주어 이야기해서는 직성이 안 풀린다. 인생사 입력값이 있으면 당연히 결과치라는 게 있기 마련인데, 자폐스펙트럼 아이는 그 '입력값'을 원하는 게 손에 닿을 때까지 무한반복해 투입한다. "아 쫌, 아들아 한 번만 얘기해" 힘주어 이야기해 보아도 열 번, 아니 진짜로 백 번은 얘기하는 듯하다. '뮤지엄'도 그중 하나였다. 미국에 도착한 첫 주 금요일에 '어린이 박물관 (Boston Children's Museum)'에 갔더니, 그 후 금요일이 돌아오는 듯하면 어김없이 뮤지엄 타령을 해댔다. "간다고오! 간다니까! 한 번만 얘기해"
미국 뮤지엄이 뭐 그리 좋을까? 한국에서 자주 들렀던 키즈카페 스타일도 아니고 좋아하는 그네, 미끄럼틀만 들어찬 야외 놀이터도 아닌데, 신경다양성 아이는 뮤지엄과 사랑에 빠졌다. 한국 만 5세 아이로 치자면 MUSEUM 단어, 일상에서 툭툭 내뱉기엔 꽤나 예사롭지 않은 어휘 아닌가. 직역하자면 '박물관'인데, 나 어린 시절에 뮤지엄이라는 곳은 참 따분하고 재미없는 곳이었다. 떠올리자면, 국립민속박물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장 먼저 스치는데, 진열된 백자나 청자는 고혹적이지만 내 관심사 밖이었다. 옛사람들이 그 시절 입던 옷이나 생활기구들도 신기했지만 손에 닿을 수 없는 유리벽 저 편에 안착해 있었으니... 만져보지도 못하고 가까이 들여다보지도 못할진대, 재미없을 만했다. 학교에서 소풍을 박물관으로 간다 치면, "아, 지루해" 탄식이 쏟아지던 라떼시절이었다.
만져보지도 못하고
가까이 들여다보지도 못하는데
"아, 지루해"
탄식이 쏟아지던 박물관이었다
미국에서 툭하면 "뮤지엄 가자"고 하는 통에 두 곳의 뮤지엄에서 연간권을 구입했다. 각각 1년간 무제한 입장할 수 있는 패스가 200달러가 족히 넘으니 원화로 따지자면, 박물관 가겠다고 60만 원 정도 쓴 셈이었다. (아고, 내 텅장) 아이들과 한번 방문해서 본전을 뽑고 나오기에는 쉽지 않기 때문에 조금씩 최대한 자주 방문해야겠다는 심산으로 끊은 연간권. 애미가 철저한 비용편익을 따져 고민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애들은 저 멀리 뮤지엄 간판이 보이기만 하면 입구를 향해 전력질주를 한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지루하고 심심하고 들어서면 아무것도 만질 수 없어서 '얼음'이 되어야 했던 80년대생 부모는 뮤지엄에 흠뻑 빠진 애들이 그저 신기하다.
엘리베이터 타고, 2층 가자
오빠야 아니야.
1층부터 해야 돼!
뮤지엄 입장 스탬프를 찍고 나면 비로소 시작되는 귀여운 말다툼. 신경다양성 아들은 2층에 가자고 하고, 재잘재잘 수다쟁이 딸은 그런 오빠를 제지하며 1층부터 섭렵하잖다. 남편과 같이 가면 각각 조를 짜서 나눠 다니면 되니 간편한데, 혼자 데리고 간 날은 어떻게든 합의점을 찾아 1층 빠르게 후루룩 훑고 잽싸게 2층까지 휘리릭 날아올라가야 해서 마음이 바쁘다.
비눗방울 존이 있는 1층은 아들이나 딸이나 최애 중에 하나. 집에서는 바닥 청소가 번거롭고 괜히 미끄러지기라도 할까 봐 비눗방울 절대 안 불어주는데 뮤지엄에서는 원 없이 만지고 불어볼 수 있으니 애들 마음이 감동으로 벅차오를 수밖에! 일상 속에서 '금지만 당하던' 것들이 허용되는 구역은 이렇게나 힘이 강하다. 30분이나 같은 공간에서 방울방울만 보고 있으면 지겨울 것도 같은데 손에 와닿는 비눗방울이 보글보글 피어올랐다가 훅 꺼지는 걸 한참을 들여다본다. 그 집중력을 피워 올리는 데는 신경다양성 아이나, 그렇지 않은 동생이나 큰 차이가 없다.
차 덕후인 아들에게 2층 중장비 존은 그야말로 파라다이스. 집 근처 마을 어귀에 진짜 중장비 몇 대가 세워져 있던 적이 있었는데 무조건 "하지 말라"고 했던 적이 있다. "만지지 마. 타지마. 가까이 가지 마" 이른 마 NO NO NO 3종세트. 역시나 금기의 영역을 여기선 맘껏 타보고 만지고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으니 아들이나 딸이나 '신남' 절정 되시겠다.
이쯤 하면 요즘 애들 뮤지엄은 나 어릴 적 추억의 박물관들과는 사뭇 다르지 싶다. 만질 수 있고,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공간. 딱히 와닿지 않는 시대의 유적유물에 대해 일방적으로 설명 들어야 했던 박물관이 실로 변신 많이 했구나! 싶다. 의미 있는 변신 앞에서는 자폐스펙트럼 아이도 흥을 한껏 올린다. 엄마 잔소리 듣지 않고 만져도 되니까, 가까이 다가가도 막는 사람 없으니까, 아이 표정이 조금씩 밝아진다.
만져도 되니까,
가까이 다가가도 막는 사람 없으니까
아이 표정이 조금씩 밝아진다
5세 아들과 3세 딸을 키우고 있지만, 동시에 자폐스펙트럼 아이와 그렇지 않은 평범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이 둘을 키운다는 것은 장애여부를 굳이 나누지 않더라도 고될 진대, 작은 차이가 있다면 조금 더 힘껏 '제지해야 할 일이 많다'는 점이다. "하지 마"라는 제지의 언어, 딸은 한두 번이면 납득하지만 아들은 여러 차례 입력값을 던져도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되려 또 다른 자기의 입력값만 상대방을 향해 무한 던져댈 뿐. "이거 할래요오. 하고 싶어요. 이거 하자아아아!"
하면 안 된다는 '제지의 언어'가 아이에게 먹히지 않을 때 엄마아빠는 둘 중 하나의 노선을 택할 때가 잦다. 사람 많은 곳으로의 외출을 덤덤히 포기해버리거나, 사람 많은 곳 한복판에서 '버럭' 화를 내고 얼굴을 붉히거나. 노선은 극과 극인데 엄마도 아빠도, 아이도 그날의 기분을 망친다는 점에선 같은 결론이 나온다.
무려 60만 원을 들여가며 뮤지엄 두 곳의 무한입장권을 끊은 이유는 단순했다. 제지할 필요가 별로 없어서. 자폐 소년에게 "하지 마"라는 입력값을 던지지 않아도 되어서. 아이들 맘껏 만지라고, 충분히 시간 쓰라고, 판을 깔아준 미국의 뮤지엄 안에서는 [Don't]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을 일이 없다.
축축한 비눗방울에 아이가 흠뻑 빠졌다가 나와도 옷 말리고 가라고 곳곳에 옷 말리는 기구가 친절히 세워져 있다. 위험할까 봐 더러울까 봐 매번 다가가지도 못하게 했던 중장비 기계도 아이들이 타보고 작동할 수 있게 안전한 구역을 만들어 놨다. 실컷 물장난 치고 가라고 방수 앞치마까지 좌라락 많이도 걸어놨다. 여긴 엄연히 박물관인 건데 아이들은 신나게 워터 존 즐기다가 때때로 야외 수영장 간 것 못지않게 흠뻑 젖어돌아오기도 한다. 그래도 제지할 필요가 없다. 다들 그렇게 즐겨서 타인 눈치 보느라 꼬깃꼬깃해진 마음을 느낄 겨를도 없다.
뮤지엄 가자!
뮤우지이어엄. 뮤지엄엄엄엄!
자폐 소년이 같은 말을 반복해 댈 때면 사람인지라 애미도 '짜증스러울 때'가 있지만, 뮤지엄은 흔쾌히 간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내내 수차례 반복해대도 "그래, 간다고! 가!" 응대하면서 빠르게 달려간다. '제지의 언어'를 잠깐이라도 넣어둘 수 있는 공간은 부모에게도 힐링이니까. "하지 마. 하지 말랬지" 하지 않아도 되는 미국의 뮤지엄 곳곳에서 신경다양성의 아이도, 그렇지 않은 동생도 함께 어우러져서 자유를 즐긴다. 잔소리에서 무한 해방될 수 있으니 너희들도 진짜 좋겠지. 그런 만큼, 나 역시 마음을 내려둘 수 있어서 좋다. 언제 어디에서 "아이들 좀 주의시켜달라"고 나 또한 제지받지 않아서 편하다.
한국에서 새로 개관한 도서관에 들렀다가 한껏 '제지'만 받다가 나온 적이 있다. "아이들이 뛰지 않게 해 주세요", "아이들이 만지지 않게 해 주세요", "아이들이 여기 앉으면 안 돼요". 어린이 전용 공간에서조차 하도 많은 제지를 받다가 엄마가 내가 지쳐버릴 정도였다.
도서관이 조용히 해야 하는 공간인 것은 맞지만 운영 규칙이 너무 엄격해서 다신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다짐을 해버렸다. 머무는 30분 내내 제지를 받다 보니, 나름 신경 써서 인테리어 해둔 것 같은 키즈존조차 참 얄밉게 느껴졌다. 진짜 키즈 프렌들리 (Kid-Friendly), 오티즘 프렌들리 (Autism-Friendly)는 예쁘장한 인테리어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엄격한 잣대를 살짝만 내려두고 아이들 제지하는 데 바짝 긴장해 있는 부모를 향해 살짝 미소만 지어줘도 '프렌들리' 해진다.
가뜩이나 육아에 지친 부모, 특히 신경다양성 아이를 키워가는 여정에 지친 엄마 아빠들에게도 '제지해야 하는' 의무를 잠시 풀어두는 공간이 필요하다. 자폐스펙트럼 아이가 "뮤지엄 가자"고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졸라댄 건, 곧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을 향한 열렬한 지지가 아니었을까! 맘껏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있는 힘껏 판을 깔아주는 미국 뮤지엄을 애정한다. 내년에 다시 정기권을 끊어야 할 시즌이 다가온다면 기꺼이 (텅장 생각에 손은 바르르 떨겠지만) 60만 원을 지출하지 않을까. 신경다양성 오빠도, 함께하는 동생도, 엄마 아빠도 함께 '제지받지 않는 공간'이 가끔은 절실히 필요하다.
* 브런치북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는 1편과 2편, 총 33화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국행 이전, 신경다양성 이야기의 시작이 궁금하시다면 1편으로 놀러와주세요. ►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