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디지털 OFF, 모두를 위한 자연 놀이 레시피
자그마치 22년 전의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수학여행을 간다고 해서 고이고이 잘 챙긴 준비물 하나는 바로 36장의 사진이 찍히는 일회용 카메라. 당시에도 사진이 찍히는 핸드폰을 소지하던 시절이었고, 디지털카메라를 번듯하게 챙겨 오는 친구도 있었지만, 휴대용 카메라를 지참하는 게 딱히 촌스럽고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던 시절이었다. 아마 핸드폰 카메라는 기능은 하되, 화질이 아쉬웠을 테고, 고등학생이 고가의 디카를 가지고 다니기에는 제법 무겁고 활용도도 낮았을 거다. 만만하고 가성비 좋아 챙겼을 나의 준비템은 바로 일회용 필카. 다 찍고 나서 거무튀튀한 필름 현상본까지 손에 쥐고 다니며 어떤 사진을 몇 장 찍을 건지 굵은 색연필로 표시하고 다녔으니 너무 '옛날스럽다'. 와, 근데 어떻게 36장으로 2박 3일을 버텼지?
다행히도(?) 나는 일상을 인증하는 '미디어 플랫폼 없는' 세상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내가 고3 여름 무렵을 막 보낼 무렵, 초창기 SNS라고도 할 수 있는 '사이좋은 세상'을 입문했는데 대학 수시에 최종합격하고 본격적으로 해보겠다며 뭔가 쓰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고 눌렀다. 덕분에 나 언어영역 모의 기출 좀 풀었다고 공부 인증할 필요도 없었고, 오늘 학원 완료! 라며 #오학완 인증을 남길 필요도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터넷이 아무 데서나 터지는 스마트폰은 출현 이전이었어서 사진을 찍는 족족 나의 온라인 세상에 업로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더듬어보면 너무 불편하고 심심해 보인다. 와, 진짜 실시간 업로드도 안 되는 데 심심해서 어떻게 버텼지?
와, 근데 어떻게
36장으로 2박 3일을 버텼지?
와, 진짜 실시간 업로드도 안되는데
심심해서 어떻게 버텼지?
오히려 '불가능해서' 자유로웠던 날들이었다. 사진을 무한정 찍을 수 없어서 두 손이 자유롭고, 실시간 모바일 데이터가 안 터지니 아무것도 올릴 수가 없어 되려 머리를 쉴 수 있었던 순간들. 36장만 찍을 수 있는 휴대용 필카로는 '정말 찍고 싶은 순간'만 찍어야 하지 않겠나. 지금 수학여행을 떠났다면 족히 3600장의 사진은 찍지 않았을까. 제한돼 있는 장수만 촬영하기 위해 '이건 찐이다'하는 순간에만 카메라를 주섬주섬 꺼냈다. 지금처럼 폰카를 거의 열어둔 상태로 거닐면서 온갖 인증을 다 하지는 않았던 것. 아마 배터리 성능도 안 따라줬을 게 분명하다. 맛집에 가서 입술에 대기 전 메뉴를 찰칵찰칵 찍고 '나 드디어 여기 왔노라'고 체크인하느라 맛 느낄 새도 없이 바쁘게 스토리 만들지 않았을 날들. 그 현장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에는 그 시절이 참 편했다. 그 어떤 플랫폼에 매어있지 않아도 돼서 '자유' 그 자체였다.
그땐 '뭔가 찍어대는' 몸짓이 유별나 보이는 날들이었는데 반대로 '찍지 않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날들이 됐다. 오늘 아이가 등원하는 순간이 너무 예쁜 것 같아 찍어둬야 할 것 같고, 그러고 보니 오늘 비 오는 풍경마저 운치 있어 보여서 빗방울 맺힌 창문 하나 찍어 올려야 할 것 같고, 그 풍경 바라보며 커피 한 잔 하는 각이 인스타갬성피드 만들 것 같아서 필터 하나 씌워 우아한 모드로 사진 찍고 싶다. 촬영본능과 인증욕구를 내려놓기 위해서는 적잖이 내 안의 에너지를 다스려야 하니 품이 든다. '아, 제발 그만해. 아이가 오늘 너무 예쁘면 눈 한번 더 맞추면 되잖아. 비 오는 풍경 예뻐서 두 눈에만 담기 아쉬우면, 빗소리 들으면서 청각을 열어두면 되잖아.'
찍지 않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날들이 됐다
온라인 내 계정의 피드 분위기를 띄우겠다고 톤을 맞추고 사진을 편집하는 사이 30분은 후루룩 지난다. 여기에 더해 챗지피티와 내 계정 팔로우를 훅 띄우는 데 동력이 되어줄 찰떡같은 사진 캡션문구를 고민하는 사이, 1시간 고지를 또 휘리릭 뛰어넘는다. 만약 이러한 작업이 '육퇴 한 밤'이라면 더더욱 위험해진다. 하루 내내 온갖 변수와 문제상황을 처리해 내느라 스트레스로 물든 머리와 마음을 '해독'시키기는커녕 또 다른 도파민을 좇기 위해 더 새까만 독에 담그는 느낌이랄까. 잠들 무렵까지도 디톡스 할 수 없다는 도대체 나는 언제 DE-TOX 할 수 있는 걸까. 새근새근 아이 둘을 재워두고 내일은 조금이라도 핸드폰을 '덜' 봐야지 다짐한다. 원하는 몸무게나 시험 합격과 같은 목표달성 의지가 아니라 디지털기기를 덜 쓰겠다는 마음에도 결연한 의지를 더해야 한다니, 22년 전과 얼마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건지, 허무한 웃음이 '피식' 튀어나온다. 내일은 진짜 좀 하지 말자. 아니 오늘보다는 '덜' 해보자.
스트레스로 물든 머리와 마음을
해독시키기는커녕
또 다른 도파민을 좇아
더 새까만 독에 담그는 느낌이랄까
모닝커피를 있는 그대로 음미하면 되는데 모닝커피를 분위기 좋게 '찍어내기 위해' 커피를 커피로 마시지 못하고 있다. 커피 원두의 산미와 머그에서 전해지는 따땃함으로 등원전쟁에서 지친 마음을 기분 산뜻하게 깨워야 하는데, 자꾸만 미각과 촉각을 채울 기회를 놓아버리고 시각정보를 채워 익명의 누군가에게 보이는 데만 집중한다. 조회수와 팔로우수 같은 숫자에 집착하다 보면 넘쳐나는 시각정보를 재편집하고 재배치하는 데만 뇌가 몰두한다.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는데, 우리는 이미 이러한 풍경에 익숙하다. 혹자는 MZ 스럽다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하니, 좀 더 젊어 보이려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나, 회의감도 떠오른다.
그리하여 오늘 아침 등원길, 애... 써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익숙한 본능, 촬영욕구와 인증루틴을 내려놓기 위해 지인짜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나 오늘, 덜 찍자고, 덜 올리자고 다아지이임 했잖아아아!' 애들 가방 둘러메고 야무지게 챙겨나가려다가 식탁 위에 폰을 무우겁게 내려두었다. 일회용 컵 대신 개인컵 쓰자는 캠페인 아무리 많이 봐도 텀블러는 그토록 잘도 두고 다니면서 잠깐의 등원루틴에 폰 하나 내려두기가 이렇게 내키지 않는 일일 줄이야.
마침 아이 둘을 화이트 레드 조합으로 입혔더니 색감은 선명한 탓에 왜 이렇게 예뻐! 나도 모르게 뒷주머니 뒤적뒤적 폰을 찾는 손짓이 있었다는 건 안 비밀로 하겠다. 대신 어린이집 앞 초록초록 풀꽃들을 만지작 거리며 최대한 등원 시간을 늦추려고 꼼지락 대는 아이들 틈에 들어가 신나게 어깨와 팔을 간지럽히며 손을 바삐 놀렸다. 찍은 사진 한 장 없지만 왠지 오늘만큼은 내 손이 알차게 제 역할해낸 것 같아 뿌듯했달까. 핸드폰 사진첩 용량을 늘리는 대신 풀숲에서 까르르 거리며 웃음 용량 잔뜩 채웠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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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기마다 자꾸만 뜨는 경고 메시지. 기기의 용량만 무한대 늘려갔던 추억 꾸러미들을 다시 마음의 영역으로 돌려줘야 할 때인 것 같다. 단순한 동작 하나면 되는데 그걸 수행하기까지 유혹이 너무 많은 세상. 오늘 밤도 나는 같은 결의를 다지며 아이들을 재우지 않을까 싶다. 내일은 오늘보다 '덜' 찍는 하루를 보내보자. 내일 오후는 오늘 오후보다 인증욕구 덜어내는 가벼운 마음으로 반드시 보내볼 테다. 내일은 정말 '찍지 않는 마음'으로 시간을 느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