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디지털 OFF, 모두를 위한 자연 놀이 레시피
간헐적 단식을 한 지 꽤 오래되었다. 간단히 말해 하루 중 16시간을 공복 상태로 지내는 건데, 그 시작은 첫째 출산 후 살을 빼야겠다는 의지에서 시작됐다. 오후 6시까지 먹고 다음 날 아침 10시에 첫끼를 먹는 식. 밤늦게까지 주전부리가 당겨 밤 11시까지 뭔가를 먹은 날엔 기필코 16시간을 공복으로 두겠다고 결심하고 오후 3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 애썼다. 체중감량은 하고 싶은데 육아에 몰두하느라 운동할 시간은 딱히 나질 않을 때 이게 특효약 같았다. 뭘 더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면 되는 방식이라 쉬웠다.
식이요법만이 마지막 희망 한 줄기라면 난 꼭 간헐적 단식을 고집하곤 했다. 살이 급격히 빠지지는 않아도 간신히 조절해 둔 체중을 유지하는 수준으로는 꽤 괜찮은 방법이었으니까. 혹자는 간헐적 단식만으로도 다이내믹하게 살이 빠진다며 이 전략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체중관리에도 제법 효과적이라 하고, 건강한 라이프를 이어가는 데도 좋다니까, 나도 덩달아 자주 해내고야 말았다. 어느덧 매일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공복 16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연구자에 따라 '조금씩 자주 먹으라'라고 조언해 주는 분도 있지만, 그 양이 어떻든 자주 무언가를 씹어 삼키다 보면 입도, 위도, 장도 쉴 새가 없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잠깐의 휴식도 없이 먹는 족족 일을 시키는 셈이니까. 그와 반대로 60분도 아니고, 6시간도 아니고, 16시간 동안 내 몸을 긴 공백 상태로 유지한다는 데는 꽤나 인내가 필요하다. 물로 목 축이는 것 외에는 아주 작은 간식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돌아보건대 공부하다 보면 일하다 보면 아이 키우다 보면 수시로 군것질을 하게 되기 마련이지 않던가. 의식하지 않아도 내 손이 작은 까까 하나에 맞닿을 때가 있는가 하면, 라테 한 모금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괜스레 융통성 있는 척 하기 마련인데, 진짜 '아무것도' 안 먹고 비워둬야 제대로 '단식'하는 거라서 적응되기 전에는 쉽지가 않다.
간헐적 단식 왜 해?
꼭 16시간이나 안 먹어야 돼?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걸 왜 하는가! 물음표를 품을 만도 하다. 뭐 때에 따라 10시간 안 먹을 수도 있고 짧고 굵게 6시간만 안 먹어도 적잖이 '비운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배고픈 마음에 괜한 짜증과 심술이 스르륵 떠오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걸 버텨내면 단식 이후에 찾아드는 '가벼움'을 선물 받는다. 배도 딱히 안 고픈데 습관적으로 입에 뭔가를 꼬깃꼬깃 꾸겨넣던 내 모습을 잠시라도 '의지를 다해' 이겨낸 것 같아 말할 수 없이 뿌듯하기도 하고. 간헐적 단식의 효과에 대해 증빙하고 기술한 의학적 연구 결과는 다수 있을 테지만, 굳이 논문 몇 문단을 덧대어 해석하지 않더라도 난 이 두 가지 효과만으로 충분했다. (1) 일단 몸이 확실히 가벼워진다는 것. (2) 내가 '싫은 나'를 이겨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모먼트. 늦은 밤 간식을 굶거나 이른 아침 허겁지겁 혈당을 올리는 모습만 생략해도 달성할 수 있는 미션이라서 제법 해볼 만했다. 성공하는 날이 겹겹이 쌓여 루틴으로 자리 잡으면서 성취감은 배로 뛰었고.
어느 날 밤, 동네 산책로를 찬찬히 걷다가 '시간을 보려는 척' 습관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문대는 내 모습이 참 싫었다. 적당히 걷다 들어가면 될 일이고, 급히 해결해야 하는 업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습관적으로' 나온 몸짓이었다. 깜깜한 밤길에 풀숲 조명만 붉은빛으로 감도는 느낌이 딱 좋았는데 폰 액정화명의 차가운 빛이 삐져나오면서 분위기를 망치로 '꽝' 난도질 해댄 느낌. 타이밍도 너무 별로였고, 필요한 행동이 아닌 것을 제어하지 못한 나 자신도 매우 무능해 보여서 기분이 별로였다. 3초도 채 되지 않는 내 습관적 행동은 그날의 분위기를 보란 듯이 망쳤다. 그 이후 '핸드폰을 들고나가지 말아야지' 결심했다가도, 10초 만에 철회. 밤길 산책에는 혹시 모를 '위험한 순간'이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싶어 마냥 훌훌 털어내고 맨몸만 나가지 못하는 것도 함정이다. 완전 비상상황에만 only '전화기 기능'으로 쓰겠다고 서약이라도 해두는 게 나으려나!
디지털 기기에도
간헐적 단식이 필요하다
잠깐 끊어내는 내 의지
머리와 마음을 해독하는 시간이
점점 절실하다
아예 등질 수는 없는 세상이다. 수많은 업무 연락이, 시시각각 살펴야 할 트렌드와 정보들이 모두 애증의 경로, 디지털 기기를 통해 오니까 너무 고맙고 편한 건 맞으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핸드폰을 내려놓지를 못해" 아이들이랑 있을 때도 힐끔힐끔 핸드폰을 내려다봐야만 하는 딸내미에게 일침을 가하는 친정 엄마의 목소리 곁에서 "아휴, 요즘 업무연락을 다 이걸로 주고받는데 어떡해" 하고 워킹맘의 '어쩔 수 없음'을 핑계 댄 내가 있었다. 참 성가시다고, 없던 시절이 더 나았다고 이 세상 모든 디지털을 거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영원히 단식할 수 없고, 얻는 것보다 읽는 게 점점 많아진다고 나 혼자 디지털 공복 선언할 수 없는 노릇.
그래서 간헐적 단식을 떠올렸다. '영원'이라는 키워드가 비현실적이라면 대안은 '간헐적'이라는 수식어일 테니까. 16시간 공복의 시간 동안, 잠시나마 가벼워질 수 있어서 독을 덜어내는 느낌. 습관적으로 집어 먹던 야식의 고리를 끊어내는 의지. 디지털 기기와 잠깐이라도 '안녕'할 수 있는 마음도 이와 닮아 있었다. 하루 종일 안 볼 수는 없는데 저녁 7시부터 오전 11시까지만은 오프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육퇴와 등원전쟁 마친 한가로운 시간까지 폰과 작별선언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스케줄인가) 16시간이 힘들면 12시간부터 해봐도 된다. 밤 10시부터 오전 10시까지만 빠이. (씁... 오전에 급한 톡이 올 수도 있는데 이것도 좀 무린가)
까짓 거, 16시간도, 12시간도 아직 고난도로만 느껴진다면, 깔끔하게 나인투 식스는 어떨까. 밤 9시부터 아침 6시까지 내손에서 핸드폰 액정화면 떠나보내기. 그 어떤 불빛이 반짝! 해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해지기. 밤에 어떤 알림이 오든, 아침 6시 10분에 열어보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기나긴 밤을 아날로그적으로 버텨보기. 안전한 산책로만 잔잔히 걷든지, 무지 안 읽히는 책 한 권이라도 페이지 5장만 넘겨보겠다는 마음에 기대보든지. 그건 당신의 자유에 맡겨두는 걸로 하고 말이다.
'영원'이라는 키워드가
비현실적이라면
대안은 '간헐적'이라는
수식어일 테니까
난도를 확 낮추고 나니 꽤 해볼 만한 미션이겠다 싶다. 나인투 식스의 간헐적 단식을 떠올려 그려보니, 꽤 그럴싸하다. 자신이 붙으면 신기하게도 신도 나고 힘도 나는 법. 블루라이트 쿨하게 비춰대던 감각을 어떤 빛으로 채워나갈까 생각해 보니 소소히 기획하는 재미가 있다. 새로 산 독서등에 기대서 몇 해 동안 들춰보지도 못했던 리빙 잡지나 시네마 잡지 몇 섹션, 사각사각 넘기는 느낌도 색다르겠다. 서랍 저 깊숙이 넣어뒀던 블루투스 오디오 겸 라디오 꺼내서 심야 라디오 방송 오랜만에 듣고 싶다는 말랑한 감성도 불현듯 치솟는다. (앗, 이건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다. 문자 사연 보내고 싶어서 결국 꼼지락꼼지락 핸드폰을 깨우면 어쩌나) 매해 스타벅스 다이어리 마니아였는데, 다이어리 끼적이기를 언제 해보고 안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니, 모처럼 종이에 쓰는 감각을 채워나가도 좋겠다. 블루라이트 창만 잠시 꺼놔도 시각을 대체할 촉각과 청각이 이토록 풍부하다. 감각을 아예 비우는 게 아니라, 다른 걸로 채워갈 생각을 하니 흥미진진하다.
한 때는 라테를 먹었다가도 돌아서면 또 마시고 싶어 연속 두 잔 주문을 한 적도 있었다. 과자는 또 과자를 부르는 법. 초코초코한 과자 한 봉지 뜯으면 결국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손은 이미 두 번째 과자 봉지를 뜯을 때도 잦았다. 식욕의 주머니가 열리면 '쏴라라' 먹을거리에 대한 욕심을 멈춰두기란 쉽지 않아서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던 순간들. "이렇게 쉴 틈도 없이 계속 먹어도 되나?" 안 좋을 걸 알면서도 '일시정지' 버튼 누르지 못한 내 의지력 탓만 할 때가 있었다. 간헐적 단식해보겠다는 꼿꼿한 다짐처럼, 확실한 '오프 off' 선언이 없으면 그 누구도 익숙한 걸 끊어두기는 쉽지 않다. "나 지금부터 음식 끝. 내일 아침 10시부터 먹는다?" 선언은 "쟤 진짜 다이어트 지겹도록 한다"고 핀잔을 들으면서도, 사실은 그 안에 불필요한 것들을 비워보겠다는 의지이기도 해서 더 기특하고 반갑다. 단순히 안 먹겠다는 식이요법이 아니라, 안 해도 되는 것에 대해 내 의지를 다해 '중지'해보고자 하는 시도라서 중대한 삶의 전환점, 그 시초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잔소리하려고 쓰기 시작한 것은 절대 아님 주의. 그래도 나는 어떤 것에 대한 '간헐적 단식'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감히 잔소리하듯 '추천'해보고 싶다. 그게 진짜 먹는 행위 '식'과 관련된 단식이어도 되고, 어쩌면 의외로 연인과의 소통에서도 유용하고 고마운 스킬이 될지도 모른다. 사랑도, 소통도, 모든지 너무 긴밀하고 뜨거우면 결국 탈이 나는 법이니까. 잠시 식혀두는 건 어디에서든 약이 될 수 있다. 결국 내가 이야기하고픈 디지털 기기라면 '간헐적 단식' 대단히 환영이겠고.
모든지
너무 긴밀하고 뜨거우면
결국 탈이 나는 법이니까
오늘 밤은 앞서 언급한 9 to 6 대작전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 볼까 한다. 먹는 걸로 따지면 16시간 공복 상태 유지는 어렵지 않게 달성해 내면서 고작 9시간 오프 하겠다는 다짐은 꽤나 소소해서 민망한 것 나의 몫. 디지털 기기와의 긴밀함을 고려해 초보단계부터 차근차근 공복유지 프로젝트를 열어보기로 한다. 어떻게 돌려 생각해도 야금야금 나를 갉아먹는 '디지털 폭식'은 언제가 되더라도, 일시정지 하고 싶으니 말이다. 밤 9시 아이를 재워두는 순간부터 아이가 이불 젖히며 날 깨우는 아침에 이르기까지, 폰의 어떤 진동음이나 불빛에 홀린 듯 반응하지 말아야지. 밤 10시 잠시 산책을 나가게 되더라도, 위험상황이 발생하지 않을 것 같은 집 바로 코 앞 산책로만 빙빙 돌며 이 생각 저 생각해봐야지. 물 병 하나 챙겨나갈 거니까 잠시 벤치에 앉더라도 메시지나 소셜미디어 알림 확인하는 대신 수분 채우면서 잠시 눈을 감고 앉아야지.
아차차, 이 글을 9시 땡 하고 올려둔 뒤 어떤 독자분께서 '좋아요' 눌러주셔도 바로 '감사한 마음' 떠올리는 데는 제한이 있을 텐데 어떡하나! 그래도 오늘은 맘먹은 김에 9시 10분부터 쨍그랑 '좋아요' 알림이 떠도 과감히 들여다보지 않아 보겠다고 굳은 결심을 해본다. 독자 여러분, 내일 아침 6시 이후에 진심 다해 폭풍 감사해할게요. 오늘 밤도 내일 밤도 디지털 '간헐적 단식'을 위하여. 한 걸음씩 공복 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