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디지털 OFF, 모두를 위한 자연 놀이 레시피
몇 해 전, 친정 엄마가 대학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꽤나 심각하고 중요한 수술이라 마음이 내내 편치 않았고, 무엇보다 1분 1초 걱정이 앞서서 매 순간 마음이 그저 '먹구름'이었다. 입원수속을 밟으러 가서도 툭하면 눈물샘이 터져버렸고, 당시 둘째 아이가 백일도 채 되지 않았던 때라, 급하게 구한 이모님이 오후 퇴근하시기 전까지만 병원에 머물 수 있던 때였다. 외동딸 입장에서 더더욱이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입원과 퇴원이 몇 차례 반복되느라 원무과 접수처를 들락날락할 일이 수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잿빛이었던 내 얼굴이 순간 '훕'하고 터져버린 적이 있었다. 원무과에서 병실 배정을 받는 데 유독 엄마 본인이 하겠다고 나서 앉으시고는 또박또박 전하는 한 마디 말씀. "창가로 주세요"
호텔도, 레스토랑도 아닌데
무슨 창가야
내심 편안하게 병실을 썼으면 하는 마음에 1인실이나 2인실을 권하고 싶었던 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늘 본인이 접수처에 앉아 "5인실 창가로 달라"고 희망하는 배정 병동을 말씀하시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병원은 2인실이나 1인실 병동 구조가 침대에서 바로 옆으로 창가가 위치한 구조가 아니었다. (당연히 그럴 테다. 의료진들이 치료행위를 하려면 한쪽에 벽을 두는 편이 편할 테니 발 밑에 창을 두는 형태였으니까.) '창가'를 고집하는 엄마는 본인의 뺨 옆에 창가를 두고 싶으셨던 거다. 입원할 때마다 창가 바로 옆 침대를 선점하지는 못했으나 마지막 가장 길었던 입원일수의 날에 어렵사리 원무과 직원에게 창가 자리를 승인받으셨나니, 수술이 잘 끝나고 회복하는 것보다 과장 조금 더 보태 '창가 자리 득템'이 더 좋았던 날 되시겠다. (아니 도대체 이게 이렇게 좋을 일이야) 덕분에 병실을 들락날락 거리는 나도 은근슬쩍 창가뷰를 누렸으니 이게 바로 럭키비키. 이쯤 하면 우리 엄마 진짜 '창가' 마니아다.
이날 이후, 엄마와 함께하는 장소를 잡을 땐 무조건 '창가'를 고집하는 습관이 생겼다. 동네 흔한 스타벅스에 자리할 때도 책 읽는 1인석이되 '창가'를 잡고, 아이들과 함께 갔던 에버랜드 식당에서도 구석자리이되, '창가가 뺨에 와닿는' 자리가 우리 가족 명당이었다. 두 눈으로 마주하는 창문도 좋은데 서로 마주 보고 앉아있되, 측면으로 창문과 내 몸이 맞닿은 형태도 애정했다.
어찌 됐든 창문을 끼고 있으면 되었다. 밖으로 차도 보이고 높은 건물도 보이지만 나무 몇 그루가 눈 안에 담기는 풍경이 참 귀했다. 종종 나뭇잎이 색깔을 달리할 시즌이면 운 좋게 '단풍뷰'였고, 조각구름 동동 걸려서 새파란 하늘이 더 그림 같으면 그야말로 대단한 '스카이뷰'였다. 타이밍이 좋아서 다니는 사람도 없고 오가는 차도 없다면 더 고요해서 혼자만의 세계에 몰입하기에도 적당했다. 거창한 자연 풍경에 입이 떡 벌어지는 오션뷰나 리버뷰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초록초록한, 혹은 하늘하늘한 풍경은 투명한 작은 공간에 액자처럼 소소히 담겨있었다. 우리 엄마가 왜 그토록 창가창가를 본인의 ‘호’처럼 외치는지 알 만했다.
병실 창밖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회복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도 있어요
- 마이클 이스터, <편안함의 습격>, p. 193 -
친정 엄마의 유별난 고집에는 이유가 있었다. 마이클 이스터의 <편안함의 습격> 책장을 넘기다 보니 그 힌트가 숨어있었다. "병실 창밖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회복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도 있어요" (<편안함의 습격>, p.193). 엄마가 부르짖은 창가에 대해 근거 있는 힌트를 찾았을 때 그야말로 두 눈 번쩍. 물론 엄마가 두꺼운 논문을 몇 부씩 분석해 보고 '창가'로 몸을 두기 시작한 건 아니었겠지만, 본능적이었든 기분 탓이었든 창문 곁에 있고 싶은 데는 꽤나 과학적인 근거가 숨어있는 거였다.
병실 창밖에 얼마나 대단한 게 자리하겠나. 고작해야 대학병원 건물 나이만큼의 나무 몇 그루와 때때로 긴박하게 요란하게 들어오는 앰뷸런스, 병문안 오는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 깃든 걱정 가득 그림자 정도일 텐데, 엄마는 딱히 화사하지도 않은 풍경 요소에 간간이 사로잡히곤 했다. 숲을 바라보며 초록초록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도 아니건만, 간헐적으로 내리쬐는 옅은 햇살만으로도 외부로부터의 스트레스를 적잖이 힐링받는 느낌이랄까. 창가에 진심인 엄마 덕분에 나도 덩달아 그 힐링을 누렸다.
1984년 <사이언스>지에 실렸던 이 연구에 따르면 창밖의 자연을 내다본 환자들의 경우
합병증이 감소했고 통증이 줄었으며 그만큼 진통제 복용량도 줄었다.
마이클 이스터, <편안함의 습격>, p. 193
엄마는 이미 알고 있던 게 아닐까
유리너머로 뭐가 보이든
작고 가녀린 자연이 가져다주는 기운을
햇살 한 줄기와
튼실한 나무 한 그루,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 하나의 힘을
엄마에게 자세히 캐물은 적은 없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 "병실 창가 가장 가까운 위치에 누웠을 때와 가장 멀리 누웠을 때 고통 차이가 어땠어?", "창가에 누우니까 진짜 진통제만큼 효과가 있는 것 같아?" 그 어떤 물음표를 꼬박꼬박 띄우지 않아도 엄마는 '창가'를 확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녀같이 큭큭 대면서 수줍은 웃음을 띄우곤 하는 사람이었다. 웃음을 자아내며 움직이는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만으로도 일단 긍정적인 기운이 흘러들겠지. 잔혹한 항암 치료도 앞을 알 수 없는 스산한 방사선 치료도 창가에서 햇살 광합성 한 방이면 메스꺼운 치료조차 상쇄되는 듯했다. (물론 치료받지 않은 자, 그 고통을 함부로 논할 수 없겠지만)
엄마는 이미 알고 있던 게 아닐까. 유리너머로 뭐가 보이든, 작고 가녀린 자연이 가져다주는 기운을. 햇살 한 줄기와 튼실한 나무 한 그루,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 하나의 힘을. 아무리 보잘것없는, 형편없다고 소문난 뷰라 해도 창가에 앉아있으면 소박하게나마 나무 하나, 풀잎 몇 개쯤은 보이는 법이니까. 공식적으로 아파서 입원과 수술을 반복해야 하는 초극단의 상황에서 등산이나 숲 하이킹을 꿈꿀 수 없다면 이건 자연의 일부와 맞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창가를 고집한다는 것은.
책은 또 한 가지 쓸모 있는 교훈을 나눈다. '도시형 자연'을 접하는 것이야 말로 디지털에 지친 세대에게 신속한 처방이라고 말이다. 솔직히 바빠죽겠는 일상 속에서 꼬박꼬박 숲과 산과 강과 바다를 찾아 떠나는 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지 않은가. 나름 MZ 세대 끝자락에 위치한 내가 아무리 '자연파워'를 깨달았다 해도 당장 디지털 기기를 내려두고 자연 속으로 들어갈 작정인 건 아니다. 글을 연재하려 펼치는 맥북과 사진을 실시간 골라대는 아이폰 없이는 하루를 온전히 버티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
내가 정말 반가웠던 건 자연에서의 따분함이 갖는 힘을 이야기하는 저자도 거창한 자연 나들이를 외치지 않는다는 것. 대신 일주일에 세 번, 20분 정도씩만 공원을 걷고, 식물을 가꾸는 것만으로도 꽤나 치유가 되는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디지털 세상을 포기까진 못하겠는데, 뭔가 문제가 단단히 있다고 물음표를 던지고 싶던 내게 '도시형 자연이라는 키워드가 어찌나 반갑던지!
이상적인 신속처방은 일주일에 세 번, 1회에 20분 정도 도시, 교외, 마을에서 찾을 수 있는
이른바 도시형 자연을 접하는 것이다.
마이클 이스터, <편안함의 습격>, p. 192
친정 엄마의 창가 예찬. 그 시작이 과학적인 근거에서 시작되었든, 엄마 특유의 본능에서 비롯되었든,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건, 엄마가 그토록 좋아하는 창가에 자리 잡고 그 곁에 가만가만 따라 앉으면 누리는 효과가 꽤나 쏠쏠했다는 것.
사람 많이 드나들지 않는 노트북 전용자리에 앉으려다가 차가 수십대씩 지나다니는 별 볼 일 없는 도시뷰 창가에 앉으면 이상하리 만큼 글쓰기 영감이 팍팍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날이 있었다. 셀카 한 장을 찍어도 잘 나오겠다 싶은 조명 예술인 자리에 앉으려다가, 햇살이 조금이라도 들어오는 자연광 창가 좌석에 앉으면 5천 원짜리 커피 한 잔만으로도 근사한 분위기가 완성돼서 하루 자체가 고혹적인 예술작품 같았던 날도 있었다. 분명히 별 거 없어 보이는 창가자리는 때때로 이렇게 밋밋한 일상 한 순간에 '고명'이 되고, 심심한 고르곤졸라 피자 한 판에 '꿀'같은 존재가 되었다.
고명과 꿀을 찾아다니는 마음에는 전염성이 있다. 자리가 아무리 협소해도 창문 곁에 앉으려는 마음은 평범하고 심심한 하루를 아주 작은 무언가로 물들여보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돈을 얹어가며 예약해야 하는 그럴듯한 뷰가 없어도 자연 요소 하나에 몸과 마음을 기대다 보면 오늘 하루가 어제의 그 어떤 순간보다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도 같고, 상처받은 몸, 지쳐나가떨어진 마음도 조금씩 수습이 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효과가 좋다면 병원 원무과에서 그 마음 조금만 더 알아주고 아주 쪼끔만 더 너그러이 병실 창가자리 간절한 사람의 호소를 들어줬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아들 딸 낳으러 갈 준비하느라 출산가방을 쌌던 두 번의 날들, 고이고이 신주단지처럼 1순위 챙겨넣은 건 지루함 달래려 몇시즌 폭풍처럼 시리즈 몰아보게 해줄 태블릿 pc. 그 다음은 스마트폰 보조배터리와 충전기. 언제 무슨 업무를 on하게 될 지 몰라 고이고이 챙긴 노트북도 단연 필수템이었다. 그 어떤 준비물보다도 입원수속 당일, 그저 창문 곁 침대이기를 간절히 바라던 진심을 끌어안았던 엄마와 극과 극이지 아니한가. 핸드폰이든, 태블릿pc든, 뭐라도 전원 켜서 넷플릭스 여러 개 시즌의 드라마를 덧대어야만 병동의 스산한 기운과 언제 엄습할지 모르겠는 통증을 지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도시형 자연은 이상적인 신속처방이란다. 진통제 처방 횟수를 낮추는 효과가 있다니, 디지털 기기 하나 없어도 실은 고통이나 걱정 덜 수 있는 기특한 공간인 셈. 핸드폰으로 내가 얼마나 아픈지 시시각각 소셜미디어 스토리로 전하지 않아도, 유튜브의 자극적인 영상을 연속재생하며 아픔을 잊어보려 애쓰지 않아도 이토록 무해한 자연 치료제가 창가에 있는 걸 몰랐다. 딱히 어렵지도 않고 까다롭지도 않은 엄마만의 자연 놀이. 생각하고 되뇌어 볼수록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톡톡히 효과가 있었다.
늦은 점심,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릴러 가기 전에 엄마랑 카페에서 잠깐 커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굳이 전화기 통화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엄마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일단 창가를 휘적휘적 스캔하면 되니까. 디카페인 커피 두 잔을 쟁반에 챙겨 들고, 햇살 들어오는 방향을 따라간다. 예쁘장한 창가, 오늘은 유독 가을볕이 예뻐서 초록초록스럽던 뷰에 조금씩 갈색이 돈다. 초록과 갈색, 황금빛 햇살과 파랑파랑한 하늘에 취하면 커피가 코로 들어가는지 수다 속에서 녹아드는지 모를 경지에 이른다. 창가를 고집하는 엄마 덕분에 이렇게 창가 수혜를 누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