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와 식물원을 다녀오는 길이다.
이름 모를 풀들이 길게 자라 수풀을 만들고는, 그 가운데 냇물이 흐를 길을 내어놓은 풍경을 본다.
하늘을 보고 있다가 씨가 무거워지면 고개를 푹 떨구고는, 그 씨앗을 물로 떨어뜨린다는 연꽃부터.
그 옆에 닮은 듯 다르게 핀 수련꽃, 그 아래 촘촘하게 떠다니는 개구리밥,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물속엔 바삐 다니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까지.
천천히 그리고 선명하게 눈 안에 들어오는 것들이다.
가을바람에 산들거리는 보라색 꽃잎들 사이를 황홀하게 지나간다.
꽃잎 끝에 앉아 대롱으로 꿀을 빨고 있는 호랑나비를 보고 있자니, 왜 그 이름도 '호랑'인지 알 것도 같다.
우리 키의 두 배는 족히 넘는 나무에 붙은 나뭇잎은 그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 모양도, 색깔도.
가만히 올려다보면 사람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것이 그 잎들이다.
어디 나뭇잎만 그럴까.
빨강으로 짙게도 물든 꽃, 꽉 들어찬 핑크빛에 하얀 테두리를 두른 꽃잎, 하얀 물감으로 점찍어 놓은 듯한 이파리.
여기저기 눈으로 들어오는 풍경들은, 그 어느 것을 더 걸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제 빛들을 생생히 터뜨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열어 사진기를 켠다.
가까이도 찍었다가, 멀리도 찍었다가. 바로 찍었다가, 돌려서도 찍었다가.
찍힌 사진들을 천천히 넘기다 문득 깨닫는다.
'단 한 장도, 꾸밈을 넣어 찍은 것이 없구나'
풀잎에 살짝 찢어짐이 있다 하여, 없이 되게 고칠 수 있을까.
줄기 위에 애벌레가 앉았다 하여, 그 작은 것을 함부로 지울 수 있을까.
꽃잎 색이 다른 것에 비해 연하다 하여, 그 빛깔을 멋대로 더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자연은 이미도 완성체인 것을.
자연은 스스로를 고치는 법이 없다.
제 색이 아닌 것으로 변주하거나 억지로 모양을 깎아내거나, 다른 것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빛과 그림자를 안고, 때로는 부족해 보이는 모양새까지 품어내며 그 모든 것의 합으로, 하나의 풍경을 만들 뿐.
말없이 그저 감탄을 품게 하는, 하나의 장면을.
찢어진 풀잎도,
진딧물이 앉은 줄기도,
연한 색빛의 꽃잎도
그저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오히려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마저도 본연의 자기 모습이자 자신의 색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꾸밈이 없이도, 보정 하나 없이도 아름답다, 빛난다 스스로를 여길 수 있다면.
내가 나 자신을, 내가 누군가를,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그리 바라봐 줄 눈을, 우리 서로가 가지고 있다면.
다른 색깔을 입겠다며 악착같이 분투하는 대신, 나의 색을 있는 그대로 품어볼 수 있다면.
남과 다른 모습에, 남과 다른 삶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나를 감추듯 꾸며대는 일은, 적어도 없지 않을까.
내 색깔은 왜 이렇게 연한 건지, 내 꽃잎은 왜 이리도 작은 건지, 내 줄기는 왜 저렇게 뻗어나가지 못하는지.
누군가와 비교하며 나에게 맞지도 않는 색을 덧칠하고, 꽃잎을 덧붙이며 줄기를 뻗겠다며 바스러지듯 헛되이 애쓰는 일은, 적어도 없지 않을까.
옅으면 옅은 대로.
짙으면 짙은 대로.
이파리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가지가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그것 또한 '나'라는 것을 자신이 먼저 받아들여주면 어떠할까.
나를 이루는 형태, 나임을 나타내는 색깔, 내가 지닌 결을 있는 내 것으로 먼저 인정할 수 있다면.
자연이 저마다의 다른 모양과 색으로도 함께 어우러질 수 있듯, 우리 또한 각자의 색을 지니고도 서로의 삶을 빛나게 할 수 있지는 않을까.
결국 풍경을 완성하는 건 동일함이 아닌, 저마다의 다름이 함께 어우러짐이니까.
자연은,
보정이 필요 없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색도, 어떠한 꾸밈이 필요 없다.
단 한 명도 같지 않은,
모두가 다른 빛깔을 가진, 우리이니까.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나의 색을 그대로 껴안아주는 것이다.
안고 또 안고 또 안아서,
마침내 나의 빛깔로 우러나올 때까지.
* [하날빛의 글 정원]
글로 이끈 삶을, 글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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