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품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진주 Oct 16. 2020

단편소설  : 만족하는 삶 (8)

잃어버린 꿈에 대하여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머리맡에 울리는 알람을 끄고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5시 50분이었다. 알람이 울리자마자  바로 잠이 깬 모양이다. 침대에서 그대로 누워있는 상태로 기지개를 켰다. 평소라면 악몽 때문에 몸이 무거워져 있는 법도 한데 오늘은 온 몸이 뻐근하기는커녕 개운하기만 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면 항상 저릿했던 팔과 다리도 오늘은 아무렇지 않았다. 어제 밤에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던 걸까? 그러고 보니 어제 무슨 꿈을 꾸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피곤해서 단 잠에 푹 빠졌던 모양이다. 개운한 상태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너무 오랜만이어서 조금 낯설기도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혹시 악몽을 꾸지 않았던 건 어제 본 그림 전시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곧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개운한 몸 상태에 마음이 들떴는지 괜한 생각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어제는 피곤해서 악몽을 꿀 틈조차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도 시간이 있다면 그림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일찍 가서 잠깐 구경이라도 한 번 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침대에서 지체할 시간은 조금이라도 줄여야 했다.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오늘따라 화장실로 향하는 거리가 짧게 느껴졌다.           


지하철에 도착하기 전까지 내심 그림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왔던 나는 역 안의 광경을 보고는 그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면 어제처럼 판넬의 행렬이 펼쳐져 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역 안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언제 그림 전은 열리기라도 했었냐는 듯 아주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혹시 어제 전시회를 본 기억이 꿈은 아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왠지 아쉬운 마음에 아무 것도 없는 지하철 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지만 역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계속 그렇게 있다가는 일어나서면서부터 지금껏 유지했던 개운함 마저 사라질 것만 같았기에 서둘러 아쉬움을 접기로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을 벌써부터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평소처럼 개찰구로 향해 걸어가 카드를 찍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에서 내려오자마자 곧 지하철이 도착한다는 신호가 울렸고 평소처럼 지하철 문이 언제 닫힐까 걱정하며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다음 역에서 넘어 오는 지하철이 도착했고 스르륵 문이 열렸다. 나는 열린 지하철 문 사이로 여유 있게  들어갔다.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덕분인지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늘은 비어 있는 자리 중 어느 곳에 앉을 지 선택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찬바람이 들어오는 입구를 피해 좌석의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지하철이 한 정거장 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들어왔고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빈자리는 전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오랜만에 보건소와 가까운 역에 내리기 전까지 편히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시간이 꽤 흘러 지하철 방송으로 내가 내려야 할 역의 이름이 흘러나온 후에야 나는 자리에 일어났다. 편하게 앉아온 덕에 지하철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오는 발걸음은 평소보다 더 가벼웠다. 역 밖으로는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포근하게 내리 쬐고 있었다. 막 겨울이 시작되려는 시기라 차가운 칼바람이 불어오긴 했지만 오늘은 그 칼바람마저 햇살이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건소로 향하는 길목마다 아침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 앉아 있었다. 포근한 햇살 때문일까. 봄볕을 받아 땅속에서 서서히 움트는 새싹처럼 내 마음속에도 무언가가 움트려는지 마음이 간질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 아침은 다른 날들과 다르게 느껴졌다.   

  

 보건소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 직원실로 향했다. 직원실에 있는 사물함을 열어 가방과 코트를 벗어 넣고 가운을 꺼내 입고는 곧바로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꽤 이른 시간인데도  안내 데스크에는 입사 시기는 비슷하지만 나보다 9살이 더 많은 자영 씨가 미리 앉아 있었다.      


"어라. 수정씨 오늘 일찍 왔네? "

"오늘은 좀 일찍 눈이 떠져서요."

"그렇구나. 그나저나 평소엔 아침에 피곤한 표정이더니 오늘은 표정이 꽤 밝은데? 어제 일찍 들어가서 잠은 좀 푹 잤어?"

"평소엔 잠을 설치는데 어제 웬일로 잠을 푹 잤는지 오늘은 좀 개운하네요."

"생기 있어 보이고 훨씬 낫네. 앞으로도 계속 일찍 퇴근하기를 빌어야겠다. 호호."     


 자영 씨와의 간단한 대화가 오간 뒤 안네데스크로 가서 평소처럼 컴퓨터를 부팅하고 진료 순서를 적는 종이를 책상 위로 꺼냈다. 그리고 9시가 되기를 기다리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의자에 앉은 지 오래 지 않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기력함이 점점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침에 느꼈던 무언가를 움트게 할 것만 같은 간질거림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후 시간이 지날수록 아침에 충만했던 개운함이 서서히 증발해 가는 것 같았다.  

 어느새 나는 또 다시 예전처럼 서서히 무력감에 빠지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소설  : 만족하는 삶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