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와 규모가 있는 하드웨어 보다 콘텐츠가 있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관심
요즘 서울시는 고층건물 짓는 계획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창신동 재개발도 고층, 은평 사회혁신파크에도 고층, 세운상가도 헐고, 용산정비창에도, 한강변 35층 층고 제한도 없어져 한강 주변에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 설 것이라는 이야기다. 정확한 계획들은 확인해야 하지만 정책의 방향은 이렇게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다 주택이 부족해서 부동산 가격이 올랐기 때문에 공급부족을 해소하겠다는 방향으로의 정책전환에 따른 것이다.
당연히 고층 빌딩은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짓는 것 마다 고층일 필요도 없다. 그리고 빈 공간이라고 다 고층건물 짓지는 않는다.
베를린을 비롯해 유럽의 도시들이 만들어 온 도시재생 과정의 경험은 개발 일변도로 도시를 만들어 왔던 우리 도시들이 이제 다시 잠시 멈추고 되돌아 볼 시기라는 점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도시가 가진 문제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다 달라서 재생을 이루어가는 과정도 다 다르다. 그대로 모방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중 지금의 베를린의 공간들이 재생이 되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은 분단과 통일로 인한 공간의 변화 탓이 크다. 독일이 분단되면서 베를린을 가르는 장벽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도시공간들은 과거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여러 공간이 분단으로 인해 그 기능을 상실하지만 그 중 영화촬영소로 쓰였던 우파파브릭(ufaFabrik)은 그 곳을 운영하던 영화사 우파필름이 베를린 장벽이 만들어지면서 이동하게 되고 영화사도 어려워지면서 빈공간이 된 곳이었다.
베를린의 여러 빈 공간이 그렇듯 이 곳도 노숙자와 마약을 하는사람들이나 범죄자들, 뿐만아니라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 공간을 점거하고 지내다, 베를린시가 개발을 하려고 할 때 노숙자나 범죄자들은 공간을 떠났지만 문화예술인들은 자신들이 활동해 왔던 공간을 버리고 나갈 수 없었기에 시와 공간의 사용을 놓고 협상하게 이른다. 이 공간에 머물던 사람들 중 30여명이 조합을 만들어 공간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베를린 시 당국이 인정하고 수십년간의 임대계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 공간이다. 지금은 프로그램에 따라 시의 재정지원도 있어서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곳은 극장, 아이들을 위한 자유학교, 요가교실, 서커스도 공연되는 야외무대, 댄스교실, 작가들을 위한 공간, 카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이 곳을 생태친화적인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곳 카페 올레에서 점심을 먹다 보면 이 곳 직원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많이 오고 이용도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공간을 거의 그대로 두고 공간의 성격만 바꿨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낡으면 낡은 대로 그대로 두고 있다. 지붕은 햇빛발전이나 녹지로 만들어 말 그대로 생태친화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카페의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베를린은 분단의 장벽이 무너지고 난 다음의 변화로 인해 재생이 필요해진 공간이 많아졌다. 특히 동베를린지역이 그런 곳이 많고 대부분이지만 비키니 베를린(Bikini Berlin)은 분단의 장벽이 제거된 것 때문에 도시재생이 필요해진 서베를린 지역의 공간이다. 분단이 유지되던 시절에는 서베를린의 중심 지역이었던 동물원이 있는 이 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동물원역을 보면 아주 큰 역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여전히 시내버스들과 전철과 기차가 이 곳을 거쳐가고 일부는 종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통일이 되면서 베를린이 수도가 되면서 행정중심이 이동하자 이 곳이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2006년 중앙역이 동베를린 지역에 만들어져 의회나 연방수상청 등과 가까워지면서 낡은 지역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쇠락해 버린 대표적 공간이 비키니하우스(Bikinihaus)라 불리던 지금의 비키니 베를린 공간이었다. 서베를린의 중심지였을 때는 수십 개의 의류산업 업체들이 입주해 있기도 하고 건물의 투명유리창 때문에 동물원이 보인다 하여 사람들이 이름 붙여 준 비키니하우스란 이름이 있을 정도로 베를린 사람들에게는 상징적인 공간이었지만, 중앙역이 생기면서 활기를 잃어버린 곳이었다.
이곳을 2014년 새로운 개념의 쇼핑몰로 재생하면서 옛이름의 영향을 받은 비키니 베를린이라는 명칭을 유지했다. 디자인과 쇼핑, 음식이라는 컨셉을 담은 새로운 개념의 이 쇼핑몰에는 놀랍게도 베를린 지역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20개의 팝업스토어에 자리잡고 공정무역, 생태와 인권이라는 가치에 기반한 생산물들을 팔고 있다.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의 연속이 아니라 동물원이 보이는 투명한 유리창과 넓은 휴식공간, 뉴욕 하이라인을 생각해 만든 실내디자인은 쇼핑이 단지 물건을 사기 위한 행동이 아님을 말해주는 힙한 공간으로 탄생하게 만들었다. ‘나는 권력에 배고프다’는 3층 카페의 슬로건은 왠지 그 공간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간을 재생하면서 창의적 개념의 쇼핑몰을 만들고 그 곳에 젊은 창업 디자이너들을 과감하게 입주시켜 주는 정책이 도시에 역동성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재생, 공간의 혁신은 좋은 혹은 멋진 건물을 짓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