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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데이트하는 밤

잠깐 쉬어가며 쓰는 우리 이야기

by 나사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날, 엄마는 그날 내내 이유 모를 우울함과 피곤에 시달렸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나에게 100달러 정도를 건네주며 '너네끼리 나가서 저녁 사 먹어라'라고 했다. 당신은 숙소에서 그냥 쉬겠다고.


남자 친구, 엄마, 나 이렇게 셋이 4일 정도 붙어 다니다 보니 엄마도 우리 눈치를 봤을지도 모른다. 60대인 엄마가 아직은 청춘인 우리 체력을 따라 올리도 만무했다. 기묘한 삼각관계(?)였다.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내 남편은 그런 엄마를 챙기기에 바빴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퉁명스럽고 내 뜻대로 해야 하는 나는 나 몰라라 하며 이국의 정취에 노상 취해있었다.


아무튼 우리는 갑자기 예루살렘에서 저녁 데이트를 할 기회를 잡았다. 이스라엘은 모험이라며 원피스는커녕 화장품도 제대로 챙겨 오지 않았는데. 부랴부랴 그나마 깔끔한 재킷과 반바지를 챙겨 입고 입술이라도 바른다. 그 재킷도 사실은 자전거용 바람막이었지만 말이다.


그도 제법 바빠 보인다. 다시 사워를 하고 머리도 가다듬고, 어디서 난 건지 셔츠도 차려입었네? 마주한 두 사람의 표정이 제법 상기됐다. 마치 처음 만난 날처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날처럼 모든 것이 새삼스럽게 설렌다.


두 손을 맞잡고 걸었다. 숙소에서 예루살렘 올드타운까지는 산책할 겸 걸어갈만한 거리였다. 아시아인이라곤 좀처럼 볼 수 없는 동네다. 그런 우리 커플을 보고 이스라엘 10대들이 계속해서 말을 건다. 더 어린아이들은 신기한 듯 쳐다본다. 아름다움엔 국경이 없어서 그런가? 착각에 취해 그에게 물었다. 나 오늘 예쁘냐고.


낮게 깔린 살구색 건물들도 어스레한 황혼으로 물들었다. 가로등이 하나 둘 노랗게 켜지기 시작한다.


욥바 게이트를 통해 들어왔다. 화려한 데이비드 타워 근방을 지나니 다시 음침해졌다. 어두컴컴해진 노포를 따라 걸었다. 갑자기 그가 "꽃 사줄까?"라고 한다. 이스라엘에도 꽃집이 있구나. 나는 또 퉁명스럽게 "아냐 됐어"라고 한다. 여행 중에 보관하기도 어렵고, 꽃 사서 무얼 하겠느냐고.


이번에는 액세서리 등을 파는 잡화점을 지나쳤다. 이전부터 우리는 커플링을 할까 말까 얘기를 하고 있어서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간 나는 반지란, 커플링이란 불필요한 억압과 구속의 상징이라고 누누이 주장해왔다. 결혼을 해서 결혼반지를 끼면 끼는 건데, 사귀는 사이에 굳이 반지로 정신적 기혼 상태를 만들 필요가 있나? 집착의 다른 표현 아닌가? 이런 생각이 바탕이 됐다.


그래도 그와는 커플링이란 걸 해보고 싶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그와 약속을 하고 언제까지나 그와 함께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적 기혼이란 개념이 구속이 아니라 안정으로 느껴졌다. 그에게 또 타박을 준다. "반지 사줘야지 반지."


반지를 한참 보던 우리는 "됐다 그냥 가자"며 다시 발길을 재촉해 황금산 사원으로 향했다. 첫 커플링인데 이스라엘 길바닥에서 살 수는 없지.


수백 년의 발걸음에 미끌해진 돌바닥을 따라 걸었다. 계단은 더욱 미끄러워 조심스럽다. 젊은 연인은 잡은 손을 시종 놓지 않고 한 걸음씩 목적지로 향했다.


밤의 황금돔 사원은 낮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형성했다. 굳이 말하자면 영화 알라딘에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A whole new world"라도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눈부시고 반짝거리며 찬란한(shining, shimmering, splendid) 올드시티가 눈 앞에 펼쳐진다.


금강산 식후경인데 식전에 하는 바람에 배가 곯았다. 어디서 먹을지도 정하지 않아 발걸음이 다시 빨라진다. 이스라엘 청춘들이 데이트한다는 신시가지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와인 한잔 하면 딱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두리번댔다. 야경을 조망할 수 있는 테라스 카페, 스테이크 하우스, 햄버거 가게 등이 눈에 띈다. 점심에 괜히 싸구려 팔라펠을 먹었다며 후회한다.


"위에도 식당이 있네!"

고개를 들어 보니 2층, 3층에도 발코니가 딸린 레스토랑들이 눈에 띈다. 1층에 있는 상가는 다소 소란스러울 수 있으니 위로 가보자며 올라간다. 올라가자마자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눈에 띈다.


"We are two"

어딜 봐도 데이트 중인 외국인 관광객. 서버는 친절하게 창가 자리로 안내한다. 조금 욕심을 내서 발코니 자리를 달라고 해본다. 흔쾌히 옮겨주는 종업원. 그리하여 이 작은 발코니석에는 우리 둘만 앉게 됐다.


코셔 피자와 뇨끼는 어떤 맛일까. 적당히 요리와 와인을 주문하고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올드시티와 달리 너무 멋지다느니, 사해가 어땠느니, 어머니는 괜찮으신거냐느니 등. 음식이 나오고 나서는 품평회가 시작됐다. 코셔 인증을 받아서 그런지 더욱 신선한 느낌이라느니. 한 모금 두 모금 들이킨 레드 와인에 얼굴도 점점 붉어진다.


눈이 마주쳤다. 아직은 그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겨 보여서 새삼 너무나 쑥스럽다.


"잠깐 눈 감아봐"


그는 매우 다정하고 깜짝 선물을 즐겨 준비하는 사람이다. '흠 아까 뭐라도 샀나?' 뭔가 주려나 보다 하고 눈을 감았다. 설마 그게 그거일 줄이야.


"이제 떠도 돼."


눈을 떴다. 작고 영롱한 물체가 보인다. 갑자기 눈물에 터져 나온다. 그가 뭐라 뭐라 했는데 내 대답은 "응"이다. 취기와 함께 정신이 몽롱해졌다.



2017년 9월 6일, 우리는 그렇게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고 이듬해 나는 진짜 기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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