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사 Apr 04. 2020

이산화탄소 구역의 침범자들

그해 삼일절 아침은 무척 흐릿하고 서늘했다. 그래도 역사적인 날을 기념해야 하지 않나. 모처럼 서대문형무소에 갔다. 한쪽 벽에 걸린 대형 태극기에서 묵념까지 하고 집에 가려니 봄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마침 옆에 있던 6척 남자가 편의점 비닐우산을 폈다. 어느새 나는 그의 이산화탄소 구역에 들어가 있었다.
 
이산화탄소 구역. 타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공간으로 45cm 이내의 아주 밀접한 거리다. 서로 마음이 편한 사이만 이 구역에 들어갈 수 있다. 불편한 사이에 숨 냄새 맡긴 싫지 않나.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의 이산화탄소 구역에 들어갔는데 오히려 안정감까지도 느껴졌다. 덕분에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 같이 사는 남자와 세 번째 데이트의 일이다.
 
사회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관계를 물리적 거리로 구분했다. 45cm는 '밀접 거리'로 가족이나 연인 등 친밀한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다.. 45~120cm 정도의 거리가 친구나 가까운 지인과 두는 개인적 거리로 격식과 비격식의 경계라고 한다. 사회생활의 거리는 120cm에서 360cm 정도다. 대화 중간에 빠져나와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360cm 이상은 연설이나 대담 등 넓은 공간에서 공식적인 행사를 할 때 두는 거리라고 한다. 그해 삼일절 내가 그의 이산화탄소 구역에서 편하게 느낀 건, 그가 썸남이니까, 호감 만땅인 상태였으니 가능했던 거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오랜 기간 종신고용, 연공서열 등의 문화를 추구해서일까. 회사가 곧 가족이라는 믿음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많다. 회사 동료는 비격식의 관계로 치부된다. 예고도 없이 45cm 이내 거리로 치고 들어온다. 치고 들어와서는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우리 사이에 뭘.'
 
친하다는 걸 구실로 후배에게 개인적인 용무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탁하는 상사들이 있다. 후배의 업무 시간까지 침범하며 사적인 부탁을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이는 회사에도 손해를 끼치는 경우다. 후배는 회사 일을 해야 할 시간에 상사의 개인 업무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업무 시간이란 자원을 낭비하는 셈이다.
 
본인은 점심시간에 개인 용무를 보면서 후배에 점심 도시락, 김밥 같은 것 좀 사다 놔달라고 하는 사람, 담배 심부름시키는 사람도 있다. 그 개인 용무라는 게 네일아트, 사우나, 낮잠 카페 가기 등이라고 한다. 디자인 업무 직원 중엔 상사 자녀의 미술 숙제를 대신해주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후배 집이 자기 집보다 가까우니 회식 후에 자고 간다. 퀵 서비스 비용 아끼겠다고 후배에 없는 외근을 만들어주는 친절도 베푼다. 출장 가는 후임에게 면세점 쇼핑 부탁을 하는 일도 꽤 들어보지 않았나.
 
하루는 서울 강서 쪽에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업무 시간에 전화가 왔다. 지하철인 모양이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고 있던 지역을 지나간다고 생각나서 연락했다고 한다.
 
외근직도 아닌데 어디를 가나 했더니 상사가 술 마시고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으러 가는 중이다. 어디로 간다고? 강일동. 강일동이라면 5호선 강동 끝인 상일동역에서 내려서 또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곳 아닌가. 그대는 서울 횡단 여행 중인가.
 
오늘 별다른 업무 없으니 그냥 지하철을 타고 다녀오라고 한다. 찾아준 분한테 사례 하라고 현금 5만원도 챙겨줬다. '너한테는 뭐 해준대?' 그의 대답을 듣고 노동청에 신고할까 했다. '술 사준대.'
 
직장 상사들의 부탁은 대체로 거절하기 모호한 수위다. 조금만 선의를 베풀면 할 수 있는 정도다. 부탁의 수위가 선의, 호의로 가능한 정도이기 때문에 들어주지 않으면 적반하장으로 나온다. '이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 사람 참 팍팍하네'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너무한 부탁이다 싶더라도 상사니까 말도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이제는 ‘팍팍하다’라고 할지라도 거절해도 된다. 이런 부탁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법대로 하자면 업무 이외의 사적인 부탁을 자꾸 할 경우 괴롭힘에 해당한다. 피해를 본 사람은 사업주, 그러니까 사장한테 이 사실을 알리면 된다. 사장이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노동청에 알리자. 노동청 조사로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판단되면 사업주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3년 이하의 징역을 선고받게 된다.
 
이 방법이 너무 지나쳤다면 소심한 복수를 계획해보면 어떨까. 서로 얼굴 붉히지는 않지만 묘하게 기분 나쁘게 하는 그런 방법 말이다.
 
오늘도 당신의 상사는 '형 한잔하고 싶다'며 저녁 자리로 꾈지 모른다. '우리 사이에' 번개는 그냥 가족 식사 같은 거 아닌가. 고기 굽기는 당신의 몫. 고기 기름을 소주 몇병으로 씻어내고 나니 2차 생각이 난다고 한다. 이때 거절하지 말고 잽싸게 노래방으로 유인하자. 우리 후배 기특하다며 먼저 선곡하라고 할지도 모른다. 복수의 서막이다. 리모컨으로 98620을 바로 시작하자. "Yello C A R D 이 선 넘으면 침범이야 삐- 매너는 여기까지.' 아이유의 '삐삐'라는 곡이다. 노래방 기계가 K모 회사라면 92373을 입력하자. "그 선 넘으면 정색이야 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