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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사 Apr 06. 2020

꼭 울타리를 쳐드려야 할까요

모세의 기적을 목격했다. 홍해가 아니라 인사동 한 소고기집에서.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때였다. 한 달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부서 회식이다. 당시 나는 그리 회식을 싫어하던 사람이 아니라서 나름 즐겁게 가고 있었다. 그래, 이 대목에서 꼰밍아웃을 한다. 나는 젊은 꼰대임에 틀림없다. 회식을 마냥 싫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여하튼 기자란 직업은 근무 시간 대부분을 외근으로 보내기 때문에 다른 직원들과 별로 교류가 없다. 회식은 한 달에 한번 회사 사람들을 보는 날이다. 다른 업종 사람들이 들으면 이상하겠지만, 실제로 회식 이외에는 볼 일이 없다.


본심은 그러면서도 같이 가는 일행과는 노상 투덜거린다. 또 회식이냐고. 또 소고기냐고. 막상 가면 남의 돈으로 먹는 소고기라고 다음날 점심까지 배부를 정도로 먹을 거면서 그런다. 한잔 두 잔 마신 다음엔 신난다고 한병 두병이다. 정해진 수순, 우주의 섭리다.


부서의 단골 고깃집 문을 열었다. 여느 때처럼 20인이 앉을 수 있게 길게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다. 부장, 팀장 양 옆은 부담스러우니까 구석 정도로 가야지. 아 이미 막내들이 앉아있네.


90년대생 막내들 덕분에 우린 중간에서 조금 옆자리다. 막내들이 구석자리에 앉는 시대가 왔구나. 격세지감을 느낀다. 내 옆엔 가장 친한 선배가, 맞은 편인 여자 동기가 앉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오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자기가 편한 사람 옆으로 앉는다. 편한 사람 옆이라 그런 걸까.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성별로 테이블이 갈렸다. 가운데 테이블은 부장과 팀장들 자리다.


동성끼리 앉으니 여자가 술을 따르네 마네 하고 떠들 것도 없다. 중간에 잠깐 차장급 남자 선배가 왔다가 머쓱한지 금세 돌아갔다. 조용히 돌아가면 좋았을 것을 '라떼는 말이야' 회식하면 룸살롱에 가네 마네 했다가 주변에 앉은 모든 여자 직원들의 눈총을 받는다. 목구멍까지 마음의 소리가 올라왔다. '선배 이제 여자 직원들 앞에서 룸살롱 타령하면 철컹철컹이에요.'


그날 회식자리만 그런 게 아녔다. 그 이후로도 부서 회식에서 여자 남자가 섞인 광경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취재원들을 만나도 예전 같았으면 저녁 약속, 술자리 잡기가 수월했는데 한동안 점심 약속만 주야장천이었다. 아군으로 남자 상사 한 명을 데리고 나가야 덜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젊은 여자 기자가 40-50대 남자들에게 저녁 먹자고 말하자고 하면 되려 곤란한 상황이 됐다. 참고로 예전엔 '넙죽'이었다.


대한민국의 많은 남성들이 마이클 펜스(Michael Pence) 미국 부통령이 된 것 같았다. 펜스룰의 창시자인 마이클 펜스는 2002년 하원의원 시절, <더 힐즈>와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아닌 여성들과 함께 술자리를 갖지 않는다'는 걸 결혼생활 규칙으로 언급했다. 술을 마시면 해이해지고 실수를 할 수 있으니 아예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거다.


분명 여성을 보호하고 미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자는 의도라고는 하는데 듣고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펜스룰이라는  우리나라에서 받아들이면서 원래 취지가 곡해된 걸지도 모르겠다. 남성들이 아예 여성에 선을 긋고 아예 밥도 먹지 않겠다, 무슨 말하기도 어렵다고 하는데 이게 진짜 펜스룰의 의미였나 싶다. 그들의 주장이 남성과 여성의 분리, 이성과 술이 있으면 문제가 '반드시' 생긴다는  진리 명제로 두고 있어서 그렇다. 여성과의 교류도 끊어서 성희롱적인 요소를 근절하겠다고 한다. 위험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의도다.


이 주장의 근간에는 '여성과의 접촉과 교류에는 성희롱적인 요소가 수반된다'라는 이상한 전제가 깔려있다. 성희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농담을 배제하고는 여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궤변으로 들리기도 한다. 혹자는 '여자들이 뭘 성희롱으로 받아들일지 모르니 알아서 피하겠다는 것'이라며 여자들이 민감하고 예민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상식과 교양의 잣대로 보면 된다. 상식과 교양의 기준으로 봤을 때 과민 반응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가 오바육바칠바를 떠는 것이고, 그 잣대를 넘어서는 말과 행동에 여자가 난리를 친다면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한 사람 문제다. 만약 어떤 여성이 '나는 단둘이 밥 먹는 것조차도 기분이 나빠'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때는 펜스룰을 적용하는 게 그 인격체에 대한 존중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도 '여자랑 무서워서 밥 못 먹겠다'는 건 '나는 여자를 성적인 대상이 아닌 생명체로는 대할 수 없다'는 무능력함을 인정하는 셈이다.


남성과 여성의 접촉이 단절되면 여성의 사회 활동이 어려워진다는 우려의 목소리는 어떤가.

이런 의견은 사회 활동이 업무 외의 커뮤니케이션을 필수조건으로 두고 있단 얘기다. 펜스룰로 이성 간의 소통도 원활해지기 어렵다는 건데. 여기서 질문. 그럼 이성 간에는 성적인 요소를 제외한 합리적이고 업무적인 소통은 한계가 있단 얘긴가?


소통이 없어지니 여성의 사회 활동이 어려워진다는 말은 기득권이 남성이란 점을 재차 부각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겨운 얘길 수 있지만, 최근의 신입사원 채용 동향, 국가고시, 공기업 등을 봐도 대체로 여성들이 서류 및 면접 전형에서 탁월한 점수를 받는다. 다만 10~20여 년 전까지 남성 위주로 사회 활동을 하다 보니 이들이 여전히 사회 고위층에 포진해있다. 그래서 새롭게 진출하는 여성들은 다소 입지가 좁아 보일 수도 있다.


억지로 이성의 교류를 끊어내는 펜스룰은 불편하다. 그래야지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주장도 답답하다. 아니, 같은 인간인데 여자 남자를 가르는 행위가 불편한 걸지도 모르겠다. 여성과 남성을 염색체 수가 조금 다른, 하지만 결국엔 '같은 인간'으로 대하는 태도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성별이 정해지기 전에 난자 정자가 만난 생명 아닌가. 서로 그렇게 존중한다면 펜스룰도 불필요한 울타리가 될 것이다. 울타리 없이도 안전하고 존중받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Photo by Jordan Rowlan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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