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숲오 eSOOPo
Aug 23. 2022
나의 초능력들 31
죽음 생각하기 : 삶에로의 지극한 의지
죽음을 잊지 않겠다는 건 잘 살아보겠다는 말의 다름아님
살아가다 보면 삶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융프라우에 올라가거나 파리의 어느 허름한 골목을 걷다가 내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과 같다. 공간이 아닌 시간으로서의 삶을 인식하려면 애써 삶의 반대편인 죽음을 들여다보아야 존재론적 의미를 자각하게 될 것이다. 죽음은 어둡고 음산한 금기 같다고 여겨 애써 피하거나 잊고 지내려 한다. 외면한다고 해서 죽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죽음에 대해 침묵한다고 해서 삶이 온전하게 빛나는 것도 아니리라. 가끔씩 부고를 받고 달려간 장례식장에서만 죽음을 생각한다면 너무 빈약할 것이다.
색상환에서 빨강의 맞은편에는 청록이 자리하고 있다. 두 색이 더해지면 무채색이 된다. 색상은 사라지고 명도만이 존재하는 색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흰색에서 검정으로 넘어가는 그곳에는 무한한 회색들이 자리하고 있다. 삶이 가지는 색과 죽음이 가지는 색을 더해야 흑백 계통의 스펙트럼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삶은 초천연색이고 죽음은 검정이라는 논리는 틀린 것이다. 삶과 조화된 죽음 그러니까 살아있는 중에 가지는 죽음에 대한 인식들만이 유의미한 것이며 그 둘의 통합이 '무수한 회색의 사색과 통찰'을 생산해낸다.
우리가 삶에 대한 애착을 보인다고 해서 삶의 처음인 탄생의 시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듯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고 해서 죽음의 직전 순간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죽어가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죽음이 깊게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 살짝 삶이 얹어져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노화가 시작하는 시점부터 죽음의 고민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면서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가기에 삶이 지속 가능하다. 그것은 원금(삶)이 줄어들수록 이자(죽음)가 점차 늘어나는 원리금균등상환표의 구조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삶의 시간이 졸아들고 죽음의 시간이 그 자리를 채워나가는 것을 믿고 싶지 않다. 아직은 청춘이라 믿고 싶고 영원히 살 수 없음에도 우리는 불멸을 꿈꾼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래에 던져진 약속들은 무슨 헛됨이란 말인가. 다음에 다음에 만나자고 그러자고 끊임없이 언약한다. 이런 무심한 간극, 그 사이사이에 죽음은 스멀스멀 버섯처럼 피어오른다. 그것을 독버섯 인양 밟고 지나갈 것이 아니라 유심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은 삶에 대한 힌트를 안겨준다. 그렇지 않더라도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부정적 판타지를 걷어내는데 도움은 될 것이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죽음을 삶만큼 자주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니힐리스트가 되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패시미스트가 되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삶이라는 것은 태양처럼 눈이 부셔 늘 곁에 두면서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은은한 달과 같은 죽음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그것의 의미들을 더듬어보는 거다. 어떤 것을 잘 보기 위해서 그 반대편의 것을 보는 것은 내 모습 전체를 잘 보기 위해서 내 몸으로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잘 비춰줄 거울 앞에 서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정면을 주시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보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