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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Sep 14. 2022

나의 초능력들 52

주저 : 신중하려다 들키는 몸짓

머뭇거린다고 머리 나쁜건 아닐 거야

망설인다고 일을 망치지는 않을 거야


무슨 일이든 매끄럽게 밀어붙이는 이들이 부러웠다. 나는 그러지 못하니까. 작은 결정에도 작은 행동에도 나름의 작정이 있기까지 복잡한 내면의 망설임이 끝도 없이 발동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갈등의 진폭에도 움직임이 있으니 동적인 면을 지녔다고 우긴다면 이 분야에서는 가장 부지런한 부류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드러나는 형태는 정적으로 보이니 게으른 행동가로 인식될 것이 분명하다. 주저함은 오해받기 쉽다.


주저는 때로 결정을 힘겨워하는 이에게는 저주 같은 순간이 되기도 한다. (굴비가 비굴에서 어원을 가지듯 주저는 저주에서 온 걸지도 몰라!) 한글과 달리 한자어로는 다음과 같이 복잡하고 낯선 두 글자로 짝을 이룬다.                       

躊躇

머뭇거릴 주와 머뭇거릴 저로 이루어져 있다. 머뭇거리고 또 머뭇거리는 것이 주저인 셈이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망설임이 주저함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결단력 결여의 뇌나 마음의 일일까. 글자를 이루는 구성에 기대어 유추해 보자면 주저함은 발의 일이다. 대체로 이런 단어들은 마음 심자가 어울릴 것 같은데 나란히 발 족자를 옆에 끼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 변의 글자들도 온전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목숨'과 '붙이다'. 왜 주저에는 절박한 목숨과 함께 덜렁거리지 않고 딱 붙는다는 의미의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해석해 본다. 주저하는 마음은 목숨을 지키려는 본능에 가까운 감정이다. 심장의 박동처럼 발을 구르며 달려가는 마음이 주저하는 순간과 닮은 것이다. 주저의 끝에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의 선택된 이동을 감수해야 한다. 가고 나면 그곳은 내 운명 같은 시간이 나를 맞이할 것이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결정짓지 못하는 신중함이 부끄럽게 들통난 모양새다. 사실 큰 결정에서나 사용해야 할 본성의 무기를 자잘한 상황까지 침투한 탓에 겁쟁이로 전락할 수 있다. 삶의 면적과 목숨의 무게는 제각각 처지가 다르니 마냥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주저할 때에는 계산을 하는 듯 보이지만 계산을 잊으려는 노력이 전부이다. 마치 주사를 맞을 때 고통의 크기를 애써 가늠하지 않고 고통 아닌 곳으로 정신을 옮겨놓으려는 노력이 더 크듯이 말이다. 주저가 보여주는 또 다른 오해는 마음은 오락가락 분주할지 모르나 육체는 발을 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꼼짝할 수 없는 상태는 어느 쪽으로든 몸을 던질 태세를 대비한다. 주저할 때 몸은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갇혀 버린다. 그래서 외부의 자극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잡아준 손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잡고 있던 손을 놓아줄 인내가 필요하다. 


주저하는 것은 것은 버벅거림이고 더듬음이기도 하다. 특히 행동보다 말에서는 자칫 눌변의 소유자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말의 힘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고 말의 힘에 짓눌러 있다. 차라리 단 하나밖에 없는 입을 닫고 두 개의 귀를 여는 쪽으로 선택한다. 항상 못다 한 이야기는 입안에서 거대한 호수처럼 떠다니고 있지만 그것을 건져낼 생각 또한 없다. 그래도 말을 하게 된다면 주저함이 깃든 발화에 더 큰 진심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매끄러운 것들은 말도 그렇고 사물도 그렇듯이 이야기를 온전하게 담아내는 것에 실패하고 만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주저함을 기꺼워한다는 것이다. 가끔씩 긴 고민 끝에 악수를 두기도 하지만 상당부분 절묘한 수를 두기도 한다. 주저하는 분야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메뉴 선택이나 오락의 결정에서는 그 자체가 놀이를 박진감 넘치게 한다. 주저한 것들의 흔적들은 뒷 손이 많이 가기도 하지만 인간의 냄새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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