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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Apr 16.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41회

쓸모없음이 정말 무용한가

41





이른 아침 좁은 골목길을 따라 산책을 하는 일은 소년에겐 중요한 일 중 하나다. 소년의 '쓸모가 없어 보이나 꼭 해야 하는 일' 중 으뜸이다. 사람마저도 쓸모가 있어야 존재가치가 있는 요즘 같은 세상에 소년은 거꾸로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인다. 말이 나온 김에 그의 쓸모없는 행위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년은 혼자 침대 생활을 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이불을 개는데 소년이 하루 중 가장 진지한 시간이다. 이 단순한 모습은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기까지 하다. 이불의 네 귀를 정확하게 맞추고 접은 후 한 번 더 같은 귀 맞추기를 하면 배게와 비슷한 사이즈의 크기가 된다. 이불 위에 얹어진 배게의 라인을 맞추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오늘의 첫 성공을 해냈어.

이게 무슨 성공 같은 거창한 행위라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소년은 스스로 만든 작은 기준의 성공을 맛보는 것이 더 큰 성공의 첫걸음이라고 여긴다. 날마다 하는 이불 개기지만 항상 맘에 들도록 네 귀가 맞지는 않아서 그날의 운세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하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 너머 창문을 열고 베란다에 있는 유일한 식물, 구아바 나무의 잎들을 만져본다. 풍성한 자태를 가지지 못했기에 어느 날엔 그 잎의 수를 세어보기도 한다. 매일 같은 구아바가 아니다. 반려식물을 오래 바라보는 이는 잘 알 것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식물일지라도 작은 성장과 함께 작은 시듦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하나의 소통처럼 느껴진다. 한참을 식물과 대화를 나누기에 반려동물만큼 만족스럽다. 그러한 작은 것들이 보여야 큰 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소년은 믿고 있다.  


오전 일정이 없는 날이면 어김없이 골목 산책을 한다. 운동화 끈을 질끈 매면서 머릿속에 보이지 않는 수첩 하나를 꺼낸다. 걷는 순간 두 다리는 펜이 되는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러니 미리 무형의 수첩을 펼쳐놓지 않으면 모든 것은 휘발되어 버려 찾을 길이 없다. 그런 적이 많아서 이제는 잊지 않는다. 이상하리만치 실제 기록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백지를 펼쳐놓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정확하고 분명하게 기록이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구어체로 떠올리는 생각들이 희한하게 문어체로 기록된다는 사실이다. 정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정답이 없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문제를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매뉴얼이 없으니 그릇된 방법이란 애초부터 없다. 누구나 동경하는 세계지만 들어가는 순간 미로의 게임. 그것을 즐길 것인가 초조해할 것인가. 모든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누구도 옳다 그르다 말해줄 수도 없는 길이 처음에는 환상적이고 신이 나 환호한다. 자주 돌아보아야 한다. 길을 잃을 수도 있으나 길은 돌아보아야 그때마다 잠깐 보이다마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소년은 세상과 달리 순서가 바뀐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만든 리듬으로 걸음을 시작하고 세상에 없는 곳을 가면서 길이라 여기고 세상에 없는 지도를 스스로 그리며 가는 식으로. 하며 결론을 내려다 두 번째 블록을 지날무렵 무언가 불만스러워 머릿 속 수첩에서 그 장을 찢어 버린다. 그런 기록과 삭제는 골목산책을 하면서 수도 없이 일어나기에 대수롭지 않았다. 앉아서 하는 브레인스토밍보다 캐주얼하고 경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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