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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Apr 22.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47회

시낭송계의 별이 지다

47





소년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루틴대로 포털 사이트에 있는 문화면 기사를 소리 내어 읽던 중 부고 기사를 보았다. 어느 시낭송가의 죽음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다.


'시낭송가들의 시낭송가' 두라시 루데르,

시낭송계의 큰 별 지다


이름도 생소했고 시낭송가들이 리스펙하는 시낭송가라니... 게다가 소년은 우리나라 낭송가도 아닌 외국의 한 낭송가의 죽음이 도대체 얼마큼의 큰 의미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소년은 기사를 천천히 소리내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헝가리를 대표하는 시낭송가로 자연스러움과 완벽함이라는 두 경지에 다다랐다는 평을 받았던 시낭송가 두라시 루데르가 타계했다. 헝가리 공영방송 HKB에 따르면 루데르는 부다페스트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루데르의 측근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에 의해 사망했다'라고 전했다. 헝가리 태생의 루데르는 20대 때부터 여러 대형 무대를 통해 등장했으며, 리스트 탄생 200주년 공연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그의 명성을 알리며 호평을 받았다...


소년은 기사를 읽어나가다 멈추었다. 그리고는 유튜브를 통해 리스트 탄생 200주년 시낭송 공연을 검색해 보았다. 검색엔진은 수많은 영상들을 열어 보여 주었지만 루데르의 영상은 단 한 건도 보이지 않았다. 더욱 그에 대한 궁금증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문득 노인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그에 대해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두 차례 통화중으로 연결이 안 되기를 반복하다 세 번째 시도에 노인이 받았다. 이미 많은 대화를 격하게 나눈 후의 목소리처럼 잠겨있었고 그건 감정이 충분히 소진된 후의 호흡이 담긴 목소리였다. 당연히 노인은 그 소식을 알고 있었고 비통하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재능을 과시하거나 기교를 뽐내기보다는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낭송가였지. 게다가 공연이 아니고는 대중 앞에 나서지 않기로 유명했네. 언론과 인터뷰한 기록도 없기도 하려니와 자신의 공연을 라디오로 내보내는 일도 상당히 불쾌해하던 독특한 사람이었어. 그러던 그가 프란츠 리스트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에 나타난 거지. 물론 루데르를 위한 행사는 아니었어. 온전히 리스트를 기억하는 자리였지. 리스트를 사랑하는 전 세계 팬들을 위해 생중계를 했었고 우리나라 공중파에서도 특별 중계를 했었다네.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에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었고 광장 중앙에 있는 36미터 기념비 아래 웅장한 무대를 설치했지. 그곳에 19대의 그랜드 피아노가 반원을 그리며 이중으로 놓여 있었고 그 앞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이 앉아 연주를 시작했어. 그때 연주한 곡이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이었네. 19번까지 있는 연주곡이다 보니 19대의 피아노가 도미노를 이루듯 한 명씩 무려 2시 24분 동안 진행되었지. 그때 가을밤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음에 취해 있었다네. 상상도 못 했지. 그가 내 눈앞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낭송이 펼쳐지게 될 줄 말이야. 랩소디 1번이 막 끝나고 나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환상적인 행사 분위기에 한층 고조되어 있었고 카메라들은 이들을 놓칠세라 부지런히 클로즈업했었던 기억이 있군. 잠시 후 조명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2번이 연주되기 시작했어. 전반부의 랏산(Lassan) 조의 연주는 그야말로 헝가리인들의 슬픔과 우울을 표현하는 듯하더군. 그때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

노인은 헝가리 춤곡의 형태인 랏산조와 프리스카(Friska) 조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 또한 리스트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루데르의 영향이 컸다. 시낭송이 감동적이었는데 음악까지 관심이 확장된 것이다. 그 극명한 표현을 드러낸 연주를 보여준 헝가리 광시곡 2번에서 등장했다는 것에 신의 한 수라는 표현을 나중에 하기도 했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신도 없고 조국도 없다

요람도 없고 수의도 없고

키스도 없고 애인도 없다


그 나라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TV자막으로 나오는 시를 보고는 단숨에 '요제프 어틸러'의 시란 걸 알았네. 특별한 기교 없이 반복되는 말들이 묘한 감동을 자아냈네. 이때만해도 그가 루데르인줄 몰랐지. 조명은 그를 비추고 있지 않았으니 말이야.


-요제프 어틸러가 시인인가요?

숨죽여 듣기만 하던 소년은 낯선 이름에 노인의 맥을 끊고 들어왔다.


-음.. 그러니까 헝가리의 윤동주 시인 정도 되려나. 헝가리가 사랑하는 국민 시인이지. 계급이 여전히 있었던 그 시절에도 어틸러만큼은 누구나 좋아했다고 하더군. 아까 그 장면을 이어가 보세. 그리고는 랏산 조의 연주에서 열정적이고 격렬한 프리스카 조로 연주가 넘어가자 마치 리스트 작곡 어틸러 작사의 곡처럼 딱 맞아떨어지게 낭송이 이어졌네.


사흘 째 먹지 못했지

많이도 조금도

스무 살 나의 힘을

나의 스무 살을 팔겠소


그때서야 핀 조명은 루데르를 비추기 시작했네. 이때 모두 경악할 수밖에 없었네. 루데르는 마치 노숙자와 같은 복장의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었던 걸세. 그러나 누추하지 않았고 자연스러웠고 낭송과 일치를 이루었네.


혹시 아무에게도 필요치 않다면

그렇다면 악마라도 사가라지

필요하다면 사람도 죽이리라


늘 화려한 의상만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시낭송가들의 공연에 눈이 익은 나로서는 충격 그 자체였지. 아, 저것이 진짜구나. 그는 시를 온몸으로 체화했구나. 기존의 낭송이라는 개념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느낌이 그날로부터 한참 갔던 걸로 기억나네.


날 잡아서 파수대에 매달고

축복받은 흙으로 나를 덮겠지

아름다운 내 심장 위에는

죽음을 부르는 풀이 자라겠지


엄청난 퍼포먼스도 없었네. 그러나 넓고 화려한 무대에서 그 작은 몸뚱이는 결코 초라하지 않았고 그로서 온전하고 거대하게 존재하고 있었지. 정말이지 신이 낭송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아. 그의 영상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워요.

-아마도 유별난 그의 성향이 배포를 막았을 것이 분명해.

-선생님은 두라시 루데르의 어떤 점이 위대하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생각하는 시낭송의 가장 이상적인 경지인 단순하면서도 특별함이라는 경지에 도달한 유일한 사람이 그가 아닐까 생각하네.


소년은 노인과의 긴 통화 후 한참을 처음 접한 외국의 시낭송가의 존재에 생각이 머물렀다. 단순함과 특별함이 공존할 수 있을까. 혹시 네모난 동그라미 같은 건 아닐까. 소년은 한동안 그 의문의 화두를 스스로에게 던지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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