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문 밖을 나서자마자 우편함에 쌓여 있는 우편물들을 챙긴다. 언젠가부터 우편함은 설레는 편지보다 부담스러운 고지서들과 광고전단지로 채워진다. 자동이체보다는 지로용지로 납부방법을 선택해 둔 탓도 있다. 마감일이 제각각인 공과금들을 직접 납부하는 번거로움을 즐겨 감수한다. 자동이체도 사람이 입력하기에 실수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보다는 지출이 체감되지 않는 것이 노인은 더 기계에 맡기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수도, 전기, 도시가스, 통신료 등의 고지서 그래프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수도와 통신료는 변동 없는 수평선을, 전기는 여름에 유독 볼록한 봉우리를 만드는 사인 sine 곡선을, 도시가스는 1-2월과 11-12월에 정점에 다다르는 코사인 cosine 곡선을 만들어내는 이 그래프는 매년 유사한 패턴이다. 삶의 흐름이 그러할까. 굽이쳐 흐르는 두 줄기의 다른 물줄기가 만나다가 헤어지거나 소멸되고 그 바탕에는 변함없는 산맥이 든든히 버티고 서 있다. 문 밖의 삼라만상에서 계절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노인의 고지서 용지에서도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하고 있었다.
-이 시에는 일곱 개의 연이 있으니 일곱 개의 컷 cut이라고 상상해 보게. 자네는 연출을 하듯 카메라 워크를 고민해야 하네. 자네가 보여주려는 이미지에 대한 카메라의 이동, 위치, 앵글, 노출 정도 등 보다 다각도로 구상을 해야 할 거야.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시의 3번째 연에 나오는 꽃도 시인은 보통명사로 칭했지만 자네는 고유명사로 치환해 보여줘야 해. 그러기에 자네의 이야기가 들어가냐 아니냐가 시의 현재성을 좌우하게 되는 거지.
노인은 소년의 낭송을 들으며 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시였고 회한이 담긴 사랑의 힘겨움과 아픔을 노래한 시였다. 소년은 사랑의 대상을 사람이 아닌 자신의 꿈을 대상으로 정했다고 했다. 노인은 신선한 설정이라고 부추겼다. 뻔한 낭송은 변하지 않는 낭송자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첫 연과 마지막 연의 대구를 동일하게 표현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담담하게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는 것을 마지막에는 조금 더 단계를 높여서 고백조로 여운을 남기고 싶었어요.
수미쌍관식의 구조를 가진 이 시는 시작과 끝이 무엇이었다고 단정하는 서술형 종결어미로 끝나기에 음률을 담아내기에 단조로움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소년은 순간 미봉책으로 마음의 모양을 살짝 틀어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노인은 어미보다는 반복되는 어구에 대한 변이에 더 집중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아름다울 것이라고 조언했다. 소년은 부분적 표현에 신경 썼고 노인은 전체의 조형과 균형미에 집중했다. 서로가 놓치는 영역을 술자리의 빈 잔처럼 서로를 놓치지 않고 채워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