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74회

삶이 위태로울 때

by 이숲오 eSOOPo

74



노인은 격주마다 일간지 문화칼럼란에 실릴 글의 초고를 쓰는 날에는 조용한 카페를 찾아 나선다. 이미 길 위에서 글감을 찾은 날은 아메리카노를, 여전히 미궁 속에서 제목조차 떠오르지 않는 날은 롱 블랙을 시킨다. 이 루틴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제조과정에서 순서를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맛과 풍미가 달라지는 두 종류의 커피가 글쓰기와 같아 보였다. 뜨거운 물은 주제나 제목이 되고 에스프레소는 내용이 된다. 오늘은 제목을 정한 뒤 내용을 쏟아부을 예정이다. 어울리는 곁가지는 폭신하게 잘 구워진 수제 스콘으로 정했다.

지금 그대는 평온한가 아니면 위태로운가.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신체적으로 영양상태가 좋은 현대인들이 점점 불안과 소외를 호소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일까.
세상은 선택을 명확하게 한 이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억지 답안을 작성하려는 순간부터 삶은 위기에 놓이게 된다.
삶은 모호하고 선택들 그 사이에 무수하게 존재한다.
죽도 밥도 아닌 상태를 기피하고 혐오하는데 그 사이에는 리조또와 빠에야 같은 삶도 있는 것이다.
큰길 사이에는 호젓한 오솔길도 있는 법이다.

완성된 글을 위한 얼개 문장을 몇 개 적어놓고는 글 맨 위로 펜을 가져갔다. 노인은 제목을 '지금 우리가 위태로운 이유'라고 썼다가 '사이를 오가는 삶이 자유롭다'로 고쳐 적었다. 위기의 사회문제를 분명한 선택 여부에 있다는 부분을 지적하려다가 선택지 사이의 삶도 가치 있다는 취지의 글로 옮겨갔다. 노인은 최대한 시낭송이 그 해결책이라는 말을 넣지 않을 작정이다. 시도 노래이면서 말하기이지만. 블라인드가 올려져 있는 창으로 햇살이 해일처럼 노인의 온몸을 덮치고 있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살짝 눈을 찡그리며 창 밖을 보다가 이내 찻잔을 응시한다. 손을 내미니 손등에 태양의 체온이 전달된다. 노인은 다 식어버린 마지막 한 모금의 롱 블랙을 입에 대며 단숨에 삼킨다. 이 빛 또한 파동이면서 입자가 아닌가. 인류가 아무리 둘 중 하나로 결정짓길 원했건만 빛은 두 가지의 어울리지 않는 특징을 다 쥐고 끝까지 버텼다. 무엇이면서 무엇인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을 노인은 알고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가 아닌가. 우리가 어떤 선택지들 사이에서 결정장애가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자연의 모습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것도 가지면서 저것도 가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선택임을 알고 있는데 세상이 우리에게 하나만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는 줄곧 자책하며 불안해했다. 노인은 그 대안의 행위가 하나씩 떠올랐지만 칼럼 란에는 직접적으로 적지는 않을 작정이다. 노인은 스콘 반 조각을 남겨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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