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이미지가 보이고 눈을 뜨면 활자가 보일 줄 알았다. 노인은 허상을 주의하라고 했다.
-암송에 집중하려고 눈을 감지 말게. 이때 자칫 활자에 매몰될 수가 있다네. 말을 할 때 필요한 건 이미지와 의도이지 활자 자체는 의미 없다는 걸 명심하게. 활자를 반복해 기억하는 것은 마치 땅만 보며 걸으면서 발걸음의 수만 세고 목적지를 머릿속에 담아두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라네. 눈을 뜬 채 이미지로 달려가 보게. 적어도 달라진 보폭으로 인해 걸음수가 달라지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테니 말일세.
노인의 발상은 항상 소년의 익숙한 상식에서 벗어나기를 즐겼으나 이 경우는 관객의 일반적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한 반전 드라마의 결말 같았다. 노인의 말을 부정할 수 없는 건 시어 중 부사나 조사의 온전한 재현에서 분명한 차이를 드러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매양'이라는 시어를 단순 암기할 때에는 매번 이 단어에서 주춤거렸다. 소년은 '늘'이나 '항상'이라고 주로 써왔기에 입말로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노인이 말한 대로 글자 그대로가 아닌 앞뒤에 있는 주체와 행위를 구체적으로 떠올리자 자연스레 엮였다. 어제 점심때 먹은 음식은 통 기억나지 않아도 반년이나 지난 생일 때의 메뉴는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처럼. 노인은 눈을 뜨고 이미지에 집중한다는 것은 시선을 활용해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적극적인 제스처라고 했다
-한 줌의 촛농처럼 물컹이는 그해 무덥던... 이 시의 도입인데 표현이 잘 안 됩니다.
소년은 며칠째 저주에 걸린 개구리 왕자처럼 하나의 목소리에 갇힌 듯 답답하다. 할 때마다 미궁이었다.문을 열고 들어가야 본론의 이야기에 집중할 텐데 자꾸 힘과 기교만 들어갔다.
-무언가 돋보이게 하고 싶거든 단순함을 추구하게.
객관적인 묘사보다는 주관적인 기분으로 드러내게. 지금은 생각하기보다 감각하기에 치중하는 것이 좋을 듯싶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온조왕이 지은 새 궁궐을 보고 그 미적 감상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는구다' 노인은 낭송도 이와 닮아야 한다고 늘 가슴에 담고 다니는 문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