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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 반신욕

0938

by 이숲오 eSOOPo Jan 0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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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욕조에 쓸쓸하고 서늘한 몸을 반쯤 누인다


길고 긴 옛이야기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흐르고 서러웠던 시간들은 목덜미를 타고 날아 오른다


수증기가 눈을 감싸고 따뜻하게 바닥까지 인도한다


이따금 얼굴에 닿는 눈송이는 못다한 이야기들이다


그립다더니 눈으로 시를 써 보내시다뇨


뒤척일 때마다 욕조의 물결은 울렁거린다 두근거림의 박자 같다 그 마디마다 출렁이는 소리


수도꼭지 끝에서 애써 참았던 눈물 한방울 떨어진다 꽃잎 같이 청아하다


오래된 생각 끝에서도 이따금 누수가 있어서


눈은 물을 만나자 서둘러 물이 되기로 한다


물이 반가워 눈이 되려 하기도 전에 일어난 사건


그래서 눈이 이긴 게임

눈은 자신의 존재를 버리면서 탄생시킬 줄 안다


그것의 탄생은 경이롭고 신비스럽다


無의 입김에서 나오는 온기를 맡아 보았는가


다투지 않고도 상생하는 법을 눈 오는 욕조에서 배운다 자연이 가르치는 것들은 날 부끄럽게 한다


진짜 배움은 노트에 적을 수 없다


적을 때마다 바람이 달려와 그 혀로 핥아 지운다


눈 내리는 욕조에 누워 눈의 세례를 받는다


지붕이 있어도 창문을 헤집고 오는 눈을 막을 길 없어서 다행이다


잊었다더니 눈으로 편지를 보내시다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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