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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에서 한 달(넘게) 산다고?

기내용 캐리어 하나만 가지고 떠난 하노이에서 어디서 살지 고민에 빠졌다

난생처음 해외여행을 떠났던 20대 시절, 거기서 처음 경험한 호스텔*의 도미토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였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였나,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관광객이 항상 넘쳐나던 그 도시엔 몇몇 유명한 호스텔이 있었는데, 내가 갔던 곳은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항상 빈 침대가 있다는 괴이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곳이었다. 그때는 십여 년 전, 인터넷으로 에약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라 무작정 전화를 해서 영어로 떠듬떠듬 빈 침대가 남아있는지 물어보고,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침대를 차지하는 식이었다. 호스텔에 전화를 하니 여유 침대가 있다고 해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가보니, 이건 뭐 이십 몇 년을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8월의 유럽, 뜨거운 공기가 저녁에는 한풀 꺾여 그럭저럭 선선한 느낌이 감도는데, 이 날씨의 이점을 활용해 들판에 커다란 천막을 드높게 친 숙소였다. 서커스 천막이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싶게 기다란 기둥이 인상적이었다. 그 안에 벙크 베드(Bunk Bed)라고도 하는 이층 침대 수십 개를 좌르륵 놓아두었다. 칸막이나 커튼이랄 것이 없으니 프라이버시는 지키기 힘들고, 남녀 혼성 숙소인 데다, 심지어 침대 시트는 이용자가 준비해 와야 했다. 당시 유럽의 호스텔은 시트가 지저분하다, 돈을 내고 시트를 빌려야 한다는 소문이 난무했던 지라 나는 배낭 안에 홑이불을 가지고 다녔는데 드디어 제 용도를 찾았다. 옆 침대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커다란 스카프를 침대 프레임의 위에서 아래로 늘어뜨리고, 소지품 도난이 걱정되니까 귀중품은 배낭 안에 넣고 배낭의 지퍼 고리와 침대 고리를 원래는 강아지 목줄이었던 금속 사슬로 엮고 자물쇠를 채웠다.


그렇게 수십 명의 여행자가 커다란 천막 안에서 같이 잠을 청하던 기억은 너무 생생하게 남아있는데, 사실 야외이기 때문에 누군가 코를 골아도 바깥의 새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스르르 꿀잠을 잘 수 있었다.





* 호스텔은 방 안에 2층 침대를 여럿 놓는 도미토리(dormitory) 구조의 숙소다. 나라에 따라 호스텔(hostel) 또는 게스트하우스(guesthouse)라고 부른다. 다만 구글에서 영어로 게스트하우스로 검색했다가는 우리가 기대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여관 스타일의 숙소가 나올 확률이 높다. 그러니 나도 이제부터 게스트하우스가 아닌 호스텔로 명칭을 통일하려고 한다.





(c) 혼자놀기 대백과사전



회사를 그만두기 2~3년 전, 일주일에 90~100시간을 꽉꽉 채워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일이 많으면 밤 11시까지 야근하는 것이 당연했고 주말에도 근무하러 나오는 것이 일상인 시절이었다. 일은 재미있었지만 그렇게 뼈와 살을 불살라가며 일한 대가는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왔다. 역류성 식도염과 이석증이 동시에 찾아온 것이다.


얼마 뒤 회사를 퇴사하고 나서 프리랜서로 독립한 다음에는 좀 괜찮아졌나 싶었다. 하지만 2년짜리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사업자등록을 한 다음 이석증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혼자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회사 다닐 때보다 더 심하게 몰아쳐서 일을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나름대로 일의 양을 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착각일 뿐,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천장이 빙그르르 도는 것을 느끼면서 올게 왔구나 싶었다. 이번에는 침착하게 어지러움이 잦아들길 기다렸다가 다시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을 더 일하다가 이렇게 일만 하다가 정신 차려 보면 책상 위에서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 같았다. 체력이 있을 때 뭔가 안 해봤던 걸 해봐야겠다 싶었는데, 마침 아시아나 항공 마일리지 유효기간이 찾아왔다. 무조건 1년 안에 유럽과 동남아 두어 곳을 다녀와야 할 정도의 마일리지였다. 그걸 쓰기 위해 억지로 나를 일에서 좀 떨어뜨릴 겸 외국에서 몇 달을 살아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고민한 곳은 베트남이었다. 마침 우리나라 여권 소지자의 경우 베트남에서 관광 목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이 총 15일에서 45일로 엄청나게 늘어난 시점이었다. 게다가 운 좋게도 LCC 즉 저가항공의 피 터지는 티켓팅에 성공해 하노이 왕복 항공권을 10만 원대에 살 수 있었다.


베트남에서 한 달 살기를 결심했을 때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은 숙소였다. 블로그 후기를 검색해 보거나 남들의 여행기를 찾아보면 최소 1~2주, 최대 1달 동안 묵을 숙소를 한국에서 미리 예약을 해가던데, 대개 중저가 호텔에 메일을 보내 장기 투숙 할인을 받거나 아니면 단기 렌트할 수 있는 아파트먼트 또는 콘도를 구하는 식이었다. 사실 아파트먼트를 빌려 숙박한 이의 후기를 보는 순간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거실과 주방이 딸린 깔끔한 아파트에 공용 헬스장과 야외 수영장이 갖춰져 있다. 후기를 쓴 이는 하루를 운동과 수영으로 시작해 낮에는 근처 관광지를 설렁설렁 한두 군데만 돌아보고 다시 밤에 와서 또다시 수영을 하고(!) 숙소 주변의 저렴하고 음식 맛 좋은 단골 식당에서 뭔가를 먹고 잠자리에 드는 삶, 멋지지 않은가. 주말에는 현지 사람들처럼 대형 쇼핑몰에 방문해 한국보다 저렴한 식료품을 사서 사진을 찍어 생생하게 SNS에 올리거나, 아니면 극장에 가서 현지에서 뒤늦게 개봉한 한국 영화를 보고 와서는 드디어 나도 봤다는 후기를 자랑스레 남기거나, 아니면 3박 4일의 짧은 휴가를 이용해 빠듯한 일정으로 그 나라를 찾은 불쌍한 한국 관광객들은 좀처럼 갈 수 없고 가려고 맘먹었다가도 다른 더 멋진 관광지에 우선 순위를 빼앗겨 결국 죽을 때까지 가지 못할, 교외의 소박한 관광지로 나들이를 갔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누린다고 해도 숙소 비용 30~100만 원 안팎, 그리고 식사를 사 먹고 관광지를 돌아다녀도 한 달 생활비는 100만 원 정도면 된다고 했다.


나도 그런 비슷한 삶을 살게 될까? 결국 작정하고 40일의 일정으로 한 달 살기를 위해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했을 때 나는 오랜만에 찾은 베트남에 적응하기 위해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들르는 하노이 올드쿼터의 저렴한 호스텔을 2박만 예약하고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심지어 저가항공으로 왕복 10만 원대에 끊은 항공권은 수하물 불포함이었기 때문에 기내용 작은 캐리어 하나에 옷가지만 대충 구겨 넣고 떠난 한 달 살기였다. 그렇게 도착한 하노이, 호스텔 도미토리 침대에 누워서 앞으로 40일 동안 어디서 머무는 것이 좋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호스텔 한 달(넘게) 살기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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