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곳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왜냐하면 돈을 아껴야 하니까!
1박에 9천 원짜리 하노이의 한 호스텔 도미토리 침대에 누운 나는, 칠이 벗겨지기 시작한 얼룩덜룩한 천장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한 달 넘게 살 숙소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베트남을 찾는 이들이 흔히 워너비로 꼽는 고급 호텔과 리조트는 일단 제외했다. 일행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방값을 나누어 내니까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 될 테지만, 혼자서 그것도 40여 일을 베트남에 머물러야 하는 나에게 고급 호텔과 리조트는 사치였다. 그건 3박 5일이나 4박 6일로 베트남을 다시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고려해 보자고 미뤄두었다. 애초에 베트남으로 떠난 나에겐 숨은 목표가 있었으니, 항공료를 제외하고 숙박과 식비만 1달에 100만 원 안쪽으로 살면서 여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것이었다.(그리고 결국 성공했다! 자세한 것은 저의 블로그에 올려두었습니다)
이리저리 조사해 보니, 오랜 기간 체류하며 여행하는 이들에겐 전 세계 어디를 가건 아래와 같은 선택지가 있다.
아무래도 베트남은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낮은 편이라서 저가 호텔을 잘 고르면 1달에 50~60만 원으로 숙박이 가능해 보였다. 호텔의 장점은 여러 사람에게 열려있는 공간이라 어떤 면에선 에어비앤비로 대표되는 홈스테이나 아파트먼트 렌트보다는 안전하고, 주기적으로 방도 청소해 준다는 것이다. 호텔 측과 잘 이야기해서 청소 회수를 줄이면 그만큼 호텔비를 깎아준다는 후기도 꽤 보였다.
19세기나 20세기 유럽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모처의 햇빛 쏟아지는 바닷가 휴양지에서 말벗 겸 가정교사 겸 감시인(?)과 함께 호텔에 장기 투숙하며 요양하는 귀족 영애의 삶. 아침마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같은 호텔에 머무는 다른 손님들과 담소를 나눈다. 모두들 바다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어 지루해하는 도중, 갑자기 목걸이 도난 사건이 일어나고 명탐정이 범인을 찾기 위해 호텔을 찾아온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잖아!
하지만 하노이의 핫플레이스 근처 호텔은 매우 비싸서 내 예산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도시외곽의 호텔 몇몇을 염두에 두고 블로그와 구글맵 후기를 읽어 본 결과, 호텔 장기 투숙은 깔끔하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깔끔해 보이지만 개미(또는 바퀴벌레)가 잔뜩 출몰한다” “주변에 식당이나 마트 같은 편의 시설이 아무것도 없고 건물 공사 중이라 시끄러워서 낮에는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등등. 물론 시험 삼아 하루 이틀 숙박해 보고 맘에 들면 장기 계약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이미 그동안 업무에 지친 상태로 하노이에 도착했던 나는, 그럴 정도로 한 달 살기를 위한 준비를 열심히(!)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호텔 장기 숙박의 꿈은 깔끔하게 버리고 다른 방법을 찾아봤다.
그다음 고민한 것은 공유 숙박 웹사이트인 에어비앤비 등에 올라오는 홈스테이였다. 집주인이 자기 집의 방을 한 칸 내주는 소박한 곳부터 집 전체를 빌릴 수 있는 곳까지 매우 다양하다. 실제로 몇몇 집들은 맘에 들어서 심각하게 장기 계약을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홈스테이는 번듯하게 간판을 걸고 영업하는 곳이 아니어서, 최악의 경우 문제 있는 호스트나 하우스메이트를 만날 경우 내 안전을 지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만약 호스트가 마스터키를 이용해서 방에 침입한다면? 같은 집을 쓰는 하우스메이트들이 시끄럽거나 지저분하다면? 그나마 에어비앤비는 신분증 인증 등등을 거쳐 좀 안전한 편이라지만, 불안한 마음은 점점 커져 갔다.
게다가 염두에 두었던 어느 홈스테이의 구글맵 후기를 검색해 본 순간 장기 투숙의 꿈 역시 깔끔하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올린 사진을 보면, 어두컴컴하고 좁은 건물 사이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틈이 보이는데 그것이 홈스테이로 가는 통로였다. 한밤중에는 이 통로를 오가면서 조명은커녕 주변에 불빛 하나 없어서 무서웠다는 것이었다. 리뷰를 쓴 이에 따르면 환락가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숙소로 돌아갈 때마다 섬뜩했다고. 물론 룸의 상태는 예약 사이트에서 본 사진과 같았지만 여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라는 것을 지나칠 수 없었다.
이럴 때 동행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론 친한 친구와도 여행지에서 한 방을 쓰면서 꼭 한 번은 싸웠던 것을 떠올리며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그다음에는 콘도나 아파트먼트를 한 달 단위로 빌리는 것을 고민했다. 부동산 렌트 회사에서 아파트 한 동에 숙소 여럿을 보유하고 단기 임대를 해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문제는 위치였다. 하노이의 경우 대개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곳은 올드쿼터와 호안 끼엠 호수, 그리고 서호 근방인데 이 동네는 워낙 오래된 건물이 많은 데다 아파트먼트보다는 호텔이 더 많았다. 깔끔한 상태의 콘도나 아파트먼트는 하노이 외곽의 주택가, 관광객은 잘 가지 않는 곳에 포진해 있었다.
이런 아파트먼트가 밀집해 있는 곳 중 대표적인 곳이 빈홈 스마트시티인데, 사진으로 봤을 때부터 고층 아파트가 잔뜩 들어선 우리나라 신도시 분위기라 그다지 끌리진 않았다. 서울에 살 때도 아파트촌이 만드는 스카이라인이 싫어서 빌라 2층에 거주하는 내가, 도처에 예쁘고 오래된 건물이 즐비한 하노이까지 와서 굳이 신도시에 머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나중에 하노이의 대형마트인 이온몰이나 GO(Bic C)에 놀러 가면서 빈홈 스마트시티나 초고층 아파트 단지 근처를 지나갔는데 역시 상자갑 같은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게 서있는 모습이라 내가 원하는 ‘외국’의 이국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실눈을 뜨고 보면 남양주나 세종이라고 우겨도 될 것 같이 지나치게 깔끔했다.
더 찾아본 결과, 하노이에 장기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서호 근처 작은 아파트먼트를 빌리는 듯했고 실제로 가보니 외국인을 위한 식품점이나 옷가게까지 있어 편리해 보였다. 그런데 이런 곳의 주인들은 장기 체류자를 선호하는 듯했다.
그러는 중 애써 미뤄두었던 고민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같은 숙소에 한 달이나 머무는 것, 과연 괜찮을까? 아무래도 숙소를 잡게 되면 근처의 동네에서 장을 보고, 빨래를 세탁소에 맡기고, 밥을 사 먹는 등 현지인처럼 생활하게 되는데 같은 동네에서 한 달이나 지낸다면 새로운 동네에서 맛보는 감각적 충격이 덜해지고 점점 자극이 없어진다. 나중에 여행이 아니라 생활이 되면서 무료하고 지겨워지지 않을까?
게다가 한 달이나 머물러야 하는 숙소가 의외로 맘에 들지 않는다면? (하수구에서 냄새가 올라옴/ 해가 지면 인적이 뜸함/ 층간 소음이 심함) 실제로 염두에 두었던 몇몇 아파트먼트 근처를 우연히 지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구글맵에서 확인할 때는 괜찮아 보였으나 밤에 인적이 끊어지는 골목 한가운데에 있어서 심란했다. 바로 앞에 8차선 고속도로가 있어서 쾌적함과 거리가 있는 곳도 있었다.
결국 늘 새로운 자극을 찾아 떠나고 싶은 혈액형 B형 인간은 남들이 안 가본 길을 가보기로 했다. 바로 호스텔을 옮기면서(나쁘게 말하면 전전하면서) 한 달 넘게 베트남을 떠도는 것!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호스텔은 노숙(!) 다음으로 여행자가 고를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숙소다. 방 하나에 도미토리 이층 침대를 적게는 4개, 많게는 12개까지 꾸역꾸역 집어넣는 스타일이다. 베트남의 경우 1박에 6천 원에서 1만 원, 태국은 1만 5천 원 안팎, 유럽은 2~5만 원, 그리고 물가가 살인적인 뉴욕이라면 5~6만 원 정도에 벙크 베드의 침대 하나를 하룻밤 동안 내 것으로 할 수 있다.
사실 인터넷에서 리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요즘은 호스텔 시설이 꽤 상향 평준화된 편이다. 옛날에는 방 하나에 매트리스 십여 개를 나란히 깔아놓고 호스텔이라고 우기는 곳도 있었고 지난 1화에서 예시로 든 것처럼 실내가 아닌 커다란 야외 텐트에서 도미토리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은 여행자들이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무시무시하고 가혹한 리뷰를 올리는 시대다. 그러다 보니 시설이 심각하게 문제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도태되거나, 아니면 여행자가 외면한 덕분에 가격이 한없이 내려가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호스텔의 가장 큰 장점은 대개 관광지 또는 번화가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이다. 밤늦게 숙소로 돌아가도 안전에 크게 문제가 없는 곳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게다가 좁은 이층 침대에서 잠드는 여행객에 대해 보상하는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커다란 공용 공간이나 라운지를 갖춘 곳이 제법 많고 이런 곳은 꽤 좋은 후기를 받기 마련이다.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여행하면서 일도 하는 디지털 노매드가 늘어난 덕분에 최근 새로 생긴 호스텔은 공용 공간에 신경 쓰는 편이다. 실제로 *포르투갈 리스본의 리빙라운지 호스텔(Living Lounge Hostel)에 묵었을 때는 지하철역에서 도보 2분이라는 좋은 위치인 데다 인테리어 잡지에서나 볼 법한 컬러풀한 가구가 놓인 멋진 라운지가 있어서 매일 아침 관광지로 향하면서도 숙소를 떠나기 싫어 아쉬웠을 정도였다. 태국 방콕에서 핫플레이스로 손꼽히는 *탐니 호스텔(Tamni Hostel)은 주택가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1층에는 그린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유명한 카페가 있고 게스트들 역시 그 카페를 공용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꽤 일찍 예약이 마감되곤 했다.
더 이상 이것저것 알아보는 것이 귀찮았던 나는, 결국 짧게는 하룻밤, 길게는 3~4일 호스텔에 묵으며 베트남 곳곳을 여행하기로 했다. 물론 이렇게 호스텔을 전전하는 비용을 다 합치면 저렴한 에어비앤비 한 달 치 숙박비와 맞먹을 테지만, 왜인지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뭔가 모험을 떠나는 것도 같고…
그래서 이렇게 브런치에 글도 올리고 말이죠.
* 포르투갈 리스본 리빙라운지 호스텔 후기를 보려면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