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나도 내일 분요도르크랑 (우즈벡팀) 같이 출국이야. 그리고 한국 사람들도 내일 돌아간다던데?"
나는 아무래도 대회를 주최한 강원도나 협회와 따로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북한 입국 전 통일부와 관련 기관을 통해 교육받은 스태프들과 다르게 금지된 행동이나 단어에 관련된 교육을 제대로 받지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 부분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상황들을 연출하기도 하였는데, 가령 휴식 시간에 당국의 허락 없이 호텔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거나 (북한은 외부 활동 시 무조건 가이드가 동행해야 함),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 (최고 존엄 관련)을 하는 경우가 생겨 당황스러운 일들이 생겼다.
그래도 그렇지, 귀국 날짜조차 다르게 잡고 말도 해주지 않는다니... 육로를 통해 버스로 개성을 통해 입국한 남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의 경우에는 벨라루스-러시아를 거쳐 북한에 입국했고 귀국편도 항공으로, 평양-베이징에서 경유 후 서울로 귀국하는 항공편이었다.
이 시점에서 남북 할 것 없이 대회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들과 대회를 치르며 친해진 터라 무서운 느낌은 없었다. 다만 '하루종일 혼자 뭐 하고 보내나...'라는 고민이 들었다.
대회 마지막 날 평양 개선문 앞에서
간단한 폐회식 연회를 마치고,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긴 여정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형 너무 수고 많으셨어요. 다음에도 함께 일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응 너도 수고 많았어, 다음이면 평양에 또 오고 싶다는 거지?
"주무세요~"
벨라루스부터 평양까지 2주가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윌렌과 나는 다소 형식적인 저녁인 사를 한 후 잠에 들었다.
다음날, 나를 제외한 모든 팀, 협회 스태프들, 내빈들, 그리고 내 룸메이트인 윌렌까지 호텔을 떠났다. 버스를 타고 가는 그들을 양각도 호텔 앞 로비에서 혼자 북한 사람들과 함께 배웅하고 있자니, 내가 마치 손님을 떠나보내는 북조선 인민이 된 것 같았다.
'이렇게 귀화 스텝을 밟게 되나.' 마지막 버스를 떠나보내며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던 나는 일단 대회 일정 때문에 내려가보지 못한 호텔 지하를 구경하기로 했다. 호텔 지하에는 부대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냉면 식당과 목욕탕도 있었다.
내가 평양에 있을 때는 한창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 간 훈풍이 불고 있을 때고, 정치인들이 회담에서 먹은 평양냉면으로 가히 평양냉면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나는 평양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선 목욕탕으로 가서 지친 몸을 풀기로 했다.
린민 호텔의 부대시설 봉사료금표
'봉사료금'이라고 쓰여 있는 메뉴판에는 다채로운 서비스들이 적혀있었다. 계산대에서 돈을 내고 입장하니 분홍색 목욕 바구니에 수건과 비누 그리고 목욕 수건을 넣어 주었다.
북한 목욕탕의 스타터 팩
막상 목욕탕에 들어서니 한국에서 보던 목욕탕과 크게 다른 부분은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목욕탕 안에 아무도 없었다. 혼자 이 넓은 탕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온탕에서 몸을 충분히 담근 후 나와 머리를 감으며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중년으로 보이는 세신사가 목욕탕으로 들어와 말을 걸었다.
"남조선에서 오셨습네까? 남조선 인민들은 어떱네까? 살만합네까?"
감시하는 사람 없는 폐쇄된 공간이 편해서였을까 아니면 처음 보는 남한 사람이 신기했던 것일까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온 그는 내게 연신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나는 제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
그는 옷을 입고 있었고, 나는 다 벗고 목욕을 하는 상태였기에….
한 차례 민망한 위기가 있었지만 상쾌하게 몸을 씻은 나는 목욕탕 옆에 있는 '평양랭면' 식당으로 향했다.
"평양냉면 하나 주세요."
식당에서도 역시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었다. 자리를 안내해 준 식당 종업원은 따듯한 물수건과 차 그리고 겨자, 다진 양념을 가져다주었다. 적막한 기다림 끝에 이윽고 주문했던 평양냉면이 나왔다.
'일단 오이는 좀 빼고~' 모든 음식의 맛을 오이 맛으로 바꿔버리는 악마의 식자재 오이를 제거한 나는 일단 아무런 소스를 넣지 않고 국물 맛을 보았다. 평양에서 처음 먹어본 평양냉면의 맛은 내가 한국에서 먹어본 평양냉면의 맛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평양에서 파는 '진짜'평양냉면
'뭐야 하나도 안 싱겁네.' 냉면의 육수는 심심한 맛이 아닌 간이 잘 되어 있었다. 면발도 뚝뚝 끊기는 면발이 아닌 오히려 칡냉면과 같은 느낌의 탄력이 있는 면발이었다. 평소 모든 음식을 싱겁게 먹지만, 평양냉면보단 함흥냉면이 더 맛있다고 생각하던 나는 한국에서 불고 있는 평양냉면 열풍과 '평양냉면의 심심한 맛이 좋다'라며 호들갑스럽게 말하던 지인들을 떠올라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역시 오리지널을 먹어봐야...'
어쨌든 남조선의 물냉면과 매우 다르지 않은 평양냉면을 맛있게 먹은 후, 호텔 로비 옆에 있던 기념품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엇을 사갈까 고민하던 나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줄 초콜릿, 인삼차 등을 샀다.
북한 내에서는 세 가지 통화로 물건을 구매할 수 있었는데, 하나는 북한의 원, 중국의인민 비, 그리고 미국의 달러였다. 대표적인 반미 국가에서 달러로 돈을 받다니, 역시 기축 통화의 힘은 대단했다.
호텔 기념품점에서 판매중인 개성고려인삼 상품
기념품점의 물건들은 절대 저렴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관광객이다 보니 외화벌이해야겠다고 생각한듯했다. 마지막 쇼핑을 끝내고 계산대로 가서 총금액을 보니 36달러 정도 나와 있었고, 나는 지갑에 있던 20달러짜리 지폐 두 개를 건넸다. 이후 잔돈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계산한 직원은 왠지 모르게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달러로 계산이 안 되나요?"
답답했던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선생님 혹시 잔돈이 없어서 그러는데 초콜릿으로 가져가시면 안 되겠습네까?"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잔돈이 없어서 초콜릿을 대신 가져가라니. 여기 나름 국제 호텔인데. 난생처음 어보는 상황에 당황했지만, 실랑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네 그럼 이거 하나 더 주세요."
나는 계산대에 올려진 초콜릿을 집으며 말했다. 이때 구매한 북한 초콜릿은 내가 먹어본 초콜릿 중 가장 아무 맛이 없는 초콜릿이었다.
그렇게 나름 하루를 보람차게 보낸 나는 객실에 앉아 평양의 어두운 야경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내일 정말 공항으로 나를 데리다 줄지, 비행기를 제대로 탈 수 있을지, 이런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북한의 특성상 외부로 연락하거나 핸드폰이 있어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기에 수일간 연락을 할 수 없었던 가족과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깊은 저녁 이러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고 급기야 연로하신 조모님들의 안부, 그리고 혹시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가 연락되지 않는 동안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며, 불안함에 밤잠을 설쳤다. 평양으로 간 나를 보낸 이들도 그렇겠지만 이것이 밖에 세상과 단절된 세계로 여행을 한 사람의 궁극적인 공포가 아니었을까.
깊은 고민과 공포에도 평양의 아침은 밝았다. 짐을 주섬주섬 싸고 내려간 호텔 로비에는 대회 기간 내내 친남매처럼 지내던 단장 형과 통역사 누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배웅을 해준다며 차에 같이 탔다.
"저 납치당하는 거 아니죠?"
어색한 분위기를 못 이겨서였을까 시답지 않은 농담들을 건내며 우리는 마침내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했다. 수화물을 싣고, 항공권을 받은 나는 게이트에서 그들과 마지막으로 마주 섰다. 그리고 준비한 명함을 건네며 이야기했다.
"그동안 정말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외국에 나오실 일 있으면 꼭 한번 연락 주세요."
"응, 꼭 연락할게."
통역 누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마지막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북한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도, 혹여 나올 수 있다고 한들 나에게 연락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나도 평생을 살며 평양을 다시 방문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아쉬움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를 보는 그들 앞에서 나 또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지만 울고 싶지 않았다. 명랑하고 밝은 남조선 동생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이제 들어가 볼게요, 두 분 건강하시고 잘 지내세요!"
두 사람을 한 번씩 꽉 안아준 후 게이트로 들어가는 순간 맺혀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후 나는 순안 공항을 출발해 별다른 문제없이 베이징을 거쳐 인천으로 귀국했다.
흔히 영화나 만화 소재로 쓰이는 '판타지 세계' 혹은 '이 세계'를 경험한다는 건 이런 느낌이 아닐까? 벌써 6년이 되어가지만 평양에서 지냈던 이 날들의 기억은 아직까지 에이전트로 활동하면서 경험한 그 어떤 것들 보다 극적이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 팀' 마지막 식사
저는 지금 평양에 있습니다 (完)
-FIN.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2023)
*본 글의 북한말은 실제 워딩과 다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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