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잘 키운다는 건

소설 설이 - 좋은 양육과 성숙한 부모란?

by 투명서재


소설 설이


심윤경 저. 한겨레출판. 2019년 01월


아이를 잘 키운다는 건


한줄평 : 좋은 양육과 성숙한 부모란?




우리는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숙한 어른은 어떤 사람인가?

진정한 어른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설이’라는 소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설이 이모 외에 이상적인 어른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나온다. 이 소설 속의 대부분 어른이 드라마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인물들 같았다. 지극히 사회화되어있지만, 미성숙한 사람들이었다. 딱 한 사람 설이가 초대 받았던 생일파티에서 보았던 어떤 엄마이다. 이름도 없다.


그녀는 설이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사실과 상관 없이 자기 딸의 생일에 설이를 초대한다. 설이 포함 딱 세 명, 생일상도 간단하다. 생일인 딸이 제일 좋아하는 잡채와 오징어튀김이 각각 양푼으로 하나 가득이다. 튀김 하나씩 손에 들고 우적우적 씹으며 돌아다니고 하루 종일 튀김이나 잡채를 먹으며 놀게 하는 그녀, 그녀는 아이들이 뭘하든 허용해주었다. 달고나를 해먹을 때도 가스 불 앞에서 잠시 도와줄뿐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나라면 현실에서 생일파티를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 아이들이 기름 묻은 손으로 여기저기 만지는 게 싫어 오징어튀김은 메뉴에서 제외할 거고, 아이가 원하는 아이들을 초대한다고 했어도 그 아이가 누군지는 물어보며, 달고나를 만들기 전에는 속으로 국자나 다른 걸 태우지 않을지, 설탕을 흘리지 않을지 골치 아파 하면서도 겉으로는 친절하게 그래, 한 번 만들어볼래? 하고 마지못해 허락했을 것 같다.


어른인 그녀는 아이들이 어떤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아이들이 뭐든 할 수 있는 자유와 최소한의 개입만 했을 뿐이다. 안전한지만 볼뿐 나머지는 아이들의 선택이다. 아이를 믿고 아이가 선택한 친구들을 믿고 뭘 하든 멀찍이 기다리고 지켜본다. 책에 나온 시현의 생일파티처럼 서빙하는 사람, 게임을 진행하는 사회자, 갖가지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메뉴를 놓지 않아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한 생일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물질적 풍요 속의 정신적 빈곤보다 물질적 결핍 속의 정신적 풍요를 선택하길 바란다. 지금 나도 물건, 물질, 충동 조절이 잘 되진 않지만, 아이가 그것을 스스로 조절, 조율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주고 싶다. 이 소설이 주는 묵직한 질문과 대비가 참 와닿았고 많은 이에게 읽히면 좋겠다.


두 번째 질문 아이를 기른다는 건 뭘까? 어떤 게 좋은 양육일까?


나는 보통 엄마다. 엄마로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청소년 상담하면서 느꼈던 것에 대한 답이다. 우선 ‘양육’의 정의를 보자. 기를 양(養) 밥 식(食(=飠)☞먹다, 음식)과 음(音)을 나타내는 羊(양)이 합(合)하여 「기르다」, 「양육하다」를 뜻한다. 羊(양)은 양의 고기, 중국(中國)에서는 고급 요리, 食(식)은 식사, 養(양)은 먹을 것을 주는 게 양육이다.


기를 육(育)은 ‘기르다’나 ‘낳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育’은 子(아들 자)자와 ⺼(육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막 출산을 끝낸 어미와 아이를 표현한 글자다. 두 글자를 합치면 '양육'은 양수를 튀기며 아이를 낳고, 먹인다는 뜻이었다. 출산과 먹을 것을 찾아 가공하여 주는 일을 양육이라 한다.


설이는 새해 첫날 보육원으로 오게 되었다. 가정과 부모가 생애 첫날부터 없다. 신이 이 아이에게는 모든 것을 0으로 설정해 놓아 어떻게 자라는지 살피는 실험을 한 것처럼. 이 아이의 시작은 남들과 다른 마이너스에서부터였다.


왜냐하면 설이는 음식물 쓰레기통 안, 과일 바구니 안에서 발견되었고 그것이 새해 첫날 생방송으로 시청자에게 생중계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탄생이 이렇게 떠들썩할 수 있을까?


아마 새해 첫날 각 병원의 분만실에서 첫 아기라며 기뻐하는 산모와 그 순간을 기사 몇 줄로 담기 위해 기다리는 수습기자들 정도. 그러나 설이는 다르다. 하얀 눈으로 온 세상 축복받은 분위기에 어디 나보다 더 탄생이 주목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해 하는 정도다. 그녀가 거기에서 발견됨으로 인해 국민은 자기가 거기에 두고 온 것처럼,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본 것 같은 충격으로 허둥지둥 보육원으로 성금을 보낸다.


그렇게 대중의 마음 빚을 한가득 안고 태어난 설이는 보육원장님의 기대대로 원장실에서 눈치 빠르고 조용하고 똑똑한 아이로 자라난다.좋은 가정에서 자라야 한다고 고집하는 원장님 뜻대로 설이는 한 번도 아닌 세 번째로 파양당한다.


파양 이유가 물론 납득할만한 이유여도 당하는 설이에겐 파양 자체가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시절 입양 경험이 설이에게 기억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중반 마지막 파양만이 희미하고 헛구역질 나는 체리향으로 기억에 남을 뿐이다. 미국 앤더슨 가족에게 입양간 설이는 그저 가족과 집에 베인 냄새 때문에 알 수 없는 구토만 지속하다 앤더슨 부부가 이러다간 아이가 죽을 것 같아 원래 키우던 이모 집으로 돌려보낸다.

그 이모는 친이모가 아니며 설이가 태어나던 날 자기는 낳을 수 없는 아이들을 잠깐 보러 온 사람이자, 이참에 보육원에 눌러 앉아 직원이 되었다. 설이가 보육원으로 돌아오고 미국으로의 입양이 무산되고 원장님이 기관에서 나가게 되었을 때 이모는 입양가정 조건이 되지 않지만 사정해 설이와 동거할 수 있었다. 이모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양육자의 기본 조건에 해당되는 게 없다.


첫째, 이모는 설이를 배 아파 낳지 않았다. 양육자에 제외된다. 둘째, 원장님이 말한 좋은 가정에 해당하지 않는다. 부모가 있는 유복한 가정이 아닌 그저 설이에겐 나이만 이모뻘인 여성이다. 설이에게 보내는 눈빛과 말, 행동은 어딘가에 홀린 듯하다. 이모의 말에서 드러난다. 설이에게 보내는 무한 믿음 "우리 설이는 뭐든지 다 잘해요." 이모가 설이를 위해 일부러 못하는 게 아니라, 진짜 살림과 교육엔 젬병이다. 설이는 그런 이모를 위해 대신 입학 서류를 작성하고 어른 아이처럼 자기 앞가림을 해나간다. 그렇다고 이모가 설이에 대해 속속들이 아느냐? 그것도 아니다. 무관심이나 방임처럼 보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제공이다. 설이는 학교에 다녀오면 다닐 학원이 없다. 혼자만의 시간 동안 뭘 할지 스스로 계획한다. 심심하다 보니 영화 한 편을 통해 영어를 터득하고 지루하다 보니 공부를 한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난다. 다른 사람의 기대와 시선에 자기를 맞추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설이는 그저 재미로, 좋아서 했던 공부를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모든 것이 시들해진다.


내가 소설 설이를 읽고 생각한 좋은 양육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 자발성과 자유


설이는 어쩔 수 없이 이모의 일하는 시간에는 혼자 감당하고 선택해야 할 것들로 넘쳐났다.


* 양육자의 허용하는 테두리와 기다림


설이의 이모가 설이에게 보여주는 허용은 아슬아슬하다. 설이에게 넓은 울타리를 쳐주고 믿고 기다려주었기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저렇게 키워도 되나? 하는 불안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다.


* 아이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


누군가와 방을 공유한다고 해도 시간은 다를 수 있으며 그 장소가 꼭 집이 아닐 수 있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숨을 수 있는 공간은 동네에 많았다. 무언가 좋지 않을 것만 같은 행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그런 시도와 실수를 통해 무엇이 되고 안 되는지를 배운다. 옛날 시골아이들은 서리, 담뱃불 붙이기, 부모의 심부름으로 가져가는 막걸리 몰래 마시기 등이다.


* 양육자의 모름, 무지


내가 아이를 모른다는 것만 알자. 내가 아이를 그저 어리고 무지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 삶을 현명하게 꾸려갈 수 있는 하나의 존재로 본다. 내 애니까 내가 안다가 아니라, 내 아이라 모른다. 실제 가능성, 잠재력은 전혀 모른다고 볼 수 있다.


* 집밥과 끼니


설이의 이모는 설이에게 군침도는 빨간 돼지불고기와 파김치를 종종 만들어준다. 냉면과 시현이가 먹는 가사도우미가 유기농 식재료로 만든 정갈한 음식, 시현 엄마가 만든 냉면이 대조되면서, 우리의 식사가 어때야 하는지, 자녀와 어떤 교감을 만들 수 있는지 돌아봤다.


* 아이가 심신이 아플 때와 먼저 요구할 때 기꺼이 신체적으로 안아주고 감정 담아주기


자신의 감정조절, 부모 스스로 감정을 수용할 수 있는 딱 그만큼 아이의 감정을 받아줄 수 있다.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는 게 먼저가 아니라, 우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 설이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아픔으로 몸부림칠 때 이모는 자신이 아기를 키워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으로 안다. 그저 아무 '말없이' 고요하게 힘껏 설이를 꼭 안아준다는 것이다.


‘그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 편이며, 네가 감당하는 그 슬픔과 힘듦을 공유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정확히 무언지 모르지만, 함께 느낄 것이고 그러므로 너는 혼자 아니다.’ 라는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고 전달하는 건 참으로 신비하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보답하고 네 말을 따르라는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너라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감싸 안겠다는 행위는 온 마음을 다해 안아주는 것밖에는 없다.


* 양육자와 아이의 관계


위의 것들보다 가장 우선하는 것이 관계다. '관계'란 우리 사이의 투명한 선인데 이것이 두터워질수록 나는 그 사람에게서 안심, 안정, 인정을 받고 싶다. 그러니 아이와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꾸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이야기 나누고 싶고 우리가 흔히 연애 초반에 느낄 수 있는 설레임과 호기심을 매 순간 갖는다.

그의 마음에 들고 싶고 날 믿어주는 만큼 자기 안의 빛을 발하여 성장시키고 싶은 것 부모가 먼저 매력적인 사람이 되자는 것, 아이들이 따라 하고 싶을 만큼. 나는 엄마처럼 살거야! 나는 아빠처럼 될거야! 라고 외칠 수 있게.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된다면, 아이들도 나를 모델링하기 때문에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기에.



ps. 소설을 통해 어떤 게 좋은 양육인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실행이 안 되는 1인입니다.


사진 출처 : yes24 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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