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에 나온 질문을 나에게 했다. 공공기관에서 일할 때였다. 나라의 건물이 그렇듯 몇 십년을 버텨낸 후 리모델링을 하느라 전체 팀이 이전한 상태였다. 그 때 나는 임신 상태였는데 두세 번 울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사무실에서 엉엉 울고, 한 번은 화장실에서 눈물을 삼켰다. 첫 번째는 이전한 건물에 우리 팀의 공간을 부장님 개인 사무실로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장님께 큰 소리를 들어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전한 건물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꿈꾸던 그가 우리 팀을 위한 사무실을 따로 내어주니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 다른 팀과 분리된 사무실 자체로 사치라는 걸 당시에는 잘 몰랐다. 그래도 서러웠다. 두 번째는 왜 우리 팀에만 정수기가 있냐는 부장님의 질타였다. 헐, 그런 것까지 질투하는 건가? 정수기는 원래부터 팀 운영비로 구입한 거고 이사할 때 그대로 우리 사무실에 설치한 거였다. 중요한 업무와 관련된 소란이었다면 그리 억울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장 당신을 왜 우선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압박으로 엄한 사소한 걸 트집 잡았다. 돌이켜 보면 나도 미숙했고 ‘그게 울 일이야?’ 싶지만 당시에는 울분이 치솟아 눈물로밖에는 표현되지 않았다.
‘일’이라는 건, 하루 삼시 세끼를 제때 챙겨 먹는 건, 사람을 참으로 치사하게 만든다. 나와 직장의 거래에서 직장이 갑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마다 느끼는 초라함은 말로 설명할 길이 없다. 그때 거기의 나에게 필요한 건 뭐였을까? 바로 ‘오티움’이다.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무언가를 틔우는 싹이 연상되었다. 문요한 저자의 ‘오티움’에서 오티움은 라틴어로 내적 기쁨을 주는 능동적 여가 활동이라는 뜻이다.
20대까지만 해도 ‘오티움’이 있었다. 한창 매일이 이벤트라고 여기며 즐겼다. 그 시절 내가 살던 자취집은 핫한 홍대 거리에서 마을버스로 쉽게 다닐 수 있는 곳에 있었다. 하루는 영화, 어느 날은 클럽공연, 다른 날은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며 퇴근 후 알찬 저녁과 주말을 보냈다. 특히 영화를 본 날이면 그 감상이 휘발되기 전에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글로 남겼다. 게시판에 차곡차곡 쌓이는 글을 보는 게 쏠쏠한 재미였다. 영화 ‘여자, 정혜’를 보고 쓴 감상글이 리뷰 이벤트에 당첨되자 흥분 상태에서 몇 초간 영화평론을 해볼까 상상했다.
그러다 30대 초반 깜냥도 되지 않는 팀장 자리를 어영부영 꿰찬 나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팀 통솔 능력은 미천하니 성실로 나의 구멍을 채우는 수밖에. 30대에 일 외에 몰두할 여가가 없었다. 매일 피곤함에 찌들어 일상의 비루함을 견디고 있었다. 집에 오면 저녁 대충 먹고 자기 바빴다. 30대의 나에게 영화, 공연, 글쓰기는 멀고먼 일이 되어버렸다.
장류진의 단편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다양한 직장인이 나온다. 안나는 조성진의 클래식 공연에, 닉네임 거북이알은 거북이를 키우는 것에, 안나와 함께 일하는 남자 직원은 레고에 빠져있다. 그들이 몰두한 것이 바로 오티움이었다. 30대 초반의 나에게 그들처럼 무언가를 손에 들려줄 수 있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나의 시간과 품을 들인 일에는 상사나 직무 관련자의 모욕적인 언사의 견딤도 스며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모멸감이 모며든다고 할까? 사회 초년생 시절이 지나면 웬만한 무시는 단련된다. 근무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력감과 잃어버린 나의 정체성은 돈으로 환산된다. 물론 그 돈과 일에 대한 자긍심은 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일에 있어서 자기의 상실과 부차적인 이득이 매번 비슷하게 교환되지 않으므로, 누구 하나는 밑지는 장사다. 직장에서는 사장이, 개인으로서는 능력 있는 직원이 손해 보는 것 같다. 공정한 거래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 때면 우리는 노곤함을 보상받기 위해 그것을 대체할 만한 쾌락을 찾는다. 바로 자잘한 소비와 취미다. 월급이라는 마약을 맞으며 버틴다는 S 기업의 직원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일의 슬픔을 대신할 물건이나 시간을 사면서 나름 자기를 위로한다.
하지만 오티움은 이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건강하게 자기에게 몰입해 체험하는 시간이다. 직장에서의 눈물을 걷어내기 위해 '보상을 위해 찾는 단기적 쾌락'이 아닌 '능동적인 여가활동으로 인한 장기적인 찐만족'이다. 문요한 저자의 ‘오티움’에서 정의는 자신을 재창조하는 능동적 휴식이라 한다. 여기에는 다섯 가지 기준이 있다. 목적이 있고 일상적, 주도적이며 깊이와 긍정적 연쇄효과가 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가족이 원해 캠핑가거나 남들 하니까 억지로 책을 읽는 게 아니다. 순수한 존재 자아를 찾는 자발적 활동이다. 그 활동을 통해 사기 충전되어 다시 전장으로 나갈 수 있게 한다.
주위 사람을 둘러보자 어떤 이는 뜨개에, 어떤 이는 따끈한 우리 차 한 잔에 오티움이 녹아있었다. 형형색색의 실과 코바늘로 한 땀씩 꼬아 작품을 만들거나, 따끈한 전통 차 한 잔을 마시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살이 시름을 잠시 잊는다. 그러면 현재 나의 오티움은 뭘까? 제 버릇 우리 집 고양이 줄까? 나는 지금도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