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를린부부 May 07. 2020

느리게 돌아가는 세상

by 베를린 부부 - Piggy

어느 날 갑자기, 청소를 하고 나니 남편의 컴퓨터가 켜지지 않았다.

사실 언제 고장 나도 이상할 것 없이 오래 쓰기도 했지만 나와는 다르게 관리를 잘하면서 쓰는 남편은 별문제 없이 오래된 컴퓨터로 이것저것 작업도 많이 했다.

그 당시 남편은 책 작업의 후반부로 사진 정리를 해서 출판사에 보내는 중이었고 컴퓨터가 켜지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사진 작업은 해야 하니 급하게라도 우선 하드를 읽을 수 있는 장치를 구하러 급하게 자툰(saturn, 독일의 전자기기 대형 샵으로 한국의 하이마트 같은 곳이다)을 갔다 왔다.

다행히도 임시방편은 찾아서 작업을 하면서 새 컴퓨터를 사기로 했다.

한국과 다르게 카드 할부가 쉽지 않아서 급여명세서 등을 직접 보내야 한다. 물론 일시불로 살 수 있으면 이 과정은 필요없겠지만 말이다.

본인인증을 하기 위해 화상통화를 통해 신분증을 이리저리 보여주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게 참 어렵다. 독어로 전화통화를 하는 것도 어렵고 이리저리 그들의 요구대로 신분증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수월하게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수십 분을 통화를 하다가도 결국 우체국을 통해 신분확인용 서류를 발급받기도 한다.


한국이라면 이게 대체 뭔 소리인가 싶은 구시대적인 과정이지만 아직도 베를린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여차저차 이런 과정을 통과해서 서류를 보내도 승인도 빨리 나지 않는다.

그 사이, 코로나 19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남편의 회사도 재택근무 결정을 했고 홈오피스 프로그램을 사무실의 본인 컴퓨터와 연동을 해야 되는데 남편의 컴퓨터는 언제 올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다행히도 내 컴퓨터를 이용해서 재택근무를 시작했고 코로나 19로 인한 도시 간의 이동제한과 상점 휴무로 인해 남편의 새 컴퓨터는 정말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거의 포기하고 기다리고 있을 때, 아마도 거진 두 달을 꽉 채워서 새 컴퓨터가 도착한 날 남편과 나는 신문물을 접한 인류처럼 환호했다.

새삼 모든 것이 겸손해지는 속도였다.


수준 높은 서비스와 엄청난 속도의 시스템에 익숙한 나는 이 곳의 속도가 이해하기 어려운 적이 많다.

대체 무얼 위해 이렇게까지 느리게 돌아가는 것인지, 지금은 1020년이 아니라 무려 2020년인데 이게 뭔가 싶은 적도 많다.

그런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이 느려 터진 속도에 익숙해지고 있고 올 때 되면 오겠지, 될 때 되면 되겠지 하고 살게 된다.

그 덕에 뭐든 당장 해결해야 되는 조급함이 아주 살짝 희미해지고 있다. 무조건은 아니지만 조급함이 사라지면서 뭔가 기다리면서 생기는 짜증도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하고.


택배기사 한 명당 한 달에 만개의 배달을 했다는 한국의 기사를 읽었다. 모두가 누리는 편리함과 신속함 뒤에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한걸음 물러나 보니 부쩍 느낀다. 한국에서 누렸던 그 삶을 당연히 생각하면 안 되겠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조금만 빨라졌으면 좋겠다. 인터넷이 이렇게 잘되는데(물론 한국에 비하면 엄청 느리다) 굳이 찾아다녀야 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건축사무실에서 일하는 신랑과 그림 그리는 아내와 아기가 살아가는 베를린 이야기는 매주 목요일 연재합니다."

이전 18화 택배는 나의 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