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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부부 Jul 27. 2020

육아의 무게는 어떻게 나눌까

by 베를린 부부-chicken

이번 주 화요일과 수요일 휴가를 냈었다. 자신의 마감을 존중해달라는 아내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밥 먹는 시간 사이에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아내가 혼자 집에서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려고 했다. 짧게 집 근처 아이를 데리고 잠깐씩 나가는 것 말고 몇 시간씩 아내 없이 아이를 데리고 나간 적이 워낙 없다 보니 겁이 났다. 사실 아이를 유아차에 태워 길을 걷거나 이동 중일 때 아이가 울고 불고 난리 치는 것보다 대중교통과 같이 닫힌 장소에서 아이의 돌발행동이 더 그랬다. 왠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민폐인 것 같아서.


화요일은 대강 어떻게 넘어갔다. 익숙한 길로 익숙한 목적지로 나만 어색 어색하게 아이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문제는 수요일이었다. 마감이 생각보다 일찍 끝난 아내와 다 함께 외출에 나섰다. 시내 공원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고 집에 들어가기 전, 집 앞 마트에 잠깐 들렀다. 요새 아이가 본인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는 행동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달라는 걸 주지 않거나 빼앗았을 때, 자신이 하고 싶은 제지할 때 돌고래처럼 소리를 꽥 지르는 행동을 하곤 한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순간마다 감정적으로 많이 요동치는데 이걸 숨기기 힘든 순간이 있다. (사실 이런 순간을 웃으며 여유롭게 넘어간 적이 더 드물다.) 그 순간이 마트 한가운데서 와 버렸다. 아이가 소리를 꽥 지르자 당황하고 화가 난 나머지 아이를 유아차에서 번쩍 들어앉고 아이의 한 손을 꽉 잡은 채로 ‘소리 지르지 마’라고 언성을 높여버렸다. 아이도, 아내도, 주변 사람들도 놀랐다. 이내 아내가 아이를 빼앗듯이 앉고 진정시키는 동안 마트를 빠져나왔다.


집으로 들어와 아이를 씻기고 밥을 먹이고 잘 준비를 하는 동안 화가 가라앉을 리 없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짜증이 났을까, 아이가 자기 전에 사과해야 하는데 등등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헤집는 사이 아내에게도 짜증을 냈다. 그때였다.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 전원을 강제 종료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더 이상 있어봐야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을 것임이 분명해서였다. 각자에게 있는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나에게는 '잠'이었다. 극도의 스트레스의 상황에 한 숨 자는 것이 나에게는 그렇게 잘 통했다. 어디든 머리만 대면 잘 자는 편이라 밤에 잠들어 아침에 깨면, 그걸로 머릿속이 대체로 정리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날의 스트레스든 보통 하루를 넘어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날은 아이가 잠든 침실에 옆에 누워 저녁 7시부터 잠을 청했다. 물론 새벽에 자다 깨다 눈을 떴다 감았다 했지만 우리 집 침실은 밤에 대단히 깜깜한 관계로 억지로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총 12시간 정도를 잤다.


어수룩한 아침에 되어 아이가 뒤척이는 소리에 잠에서 깨니 아이는 어제처럼 웃으며 놀자고 한다. 그 모습에 나 자신이 너무 미안했다. 난 아직도 어제의 장면들이 눈에 선한데 나를 보며 웃는 아이가 어딘가 모르게 애처로워 보였다. 겸사겸사 국어사전에서 '육아'의 뜻을 살펴보니 '어린아이를 기름' 이렇게 나와 있다. 무책임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이 단어의 풀이에서 육아의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부쩍 육아의 무게에 대해 고민하는 날이 많아진 것은 분명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의 영향이다. 자연스레 아이와 한 공간에 함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아이로 인한 감정의 동요도 더 자주 겪는다. 아마도 예전 같았으면 일터로 출근하러 가는 길에 잊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는 곳에 하루의 대부분을 떨어져 지내니 그곳이 나에게는 '도피처' 혹은 '피난처'였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사실 오래전부터 힘들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아이의 성장함을 느끼며 이쁘고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몸이 너무 힘들다고. 하루 종일 아이의 높이에 맞춰 앉았다, 일어났다, 쭈그렸다를 반복하고 아이를 앉았다가, 들었다가, 내려놨다를 반복하니 몸이 성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내 입장에서만 바라봤다. 나 스스로 육아에 도움이 크게 되는 '좋은 아빠'라는 콤플렉스에 빠져 살았다. 모든 상황에 적극적으로 나선다기 보다 '이 정도만 되겠지'라는 적당주의로 일상의 대부분을 모면했음을 느낀다. 아내가 자신의 일을 제쳐두고 육아에 전념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생각도 실은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디서부터 인지 내가 아내의 육아를 돕는다고 믿었다. 내가 출퇴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핑계였을까. 나의 휴가는 이제 더 이상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내가 쉬고 싶으면 내가 휴가를 내고 아이랑 놀아줘야 그녀가 쉴 수 있다. 어찌 보면 이리도 간단한 이 원리를 진작에 깨닫지 못했을까. 


아이가 유치원을 가기 전까지 우리 가족의 24시간은 가까운 미래에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다. 일요일 저녁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이 되면 나는 업무를 시작할 것이고 그녀는 다시 육아에 매달릴 것이다. 그렇게 육아의 무게에 씨름을 하다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가겠지. 앞으로 계속 무거워질 육아의 무게를 뒤로, 해야 할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은 더 많은 엄마 아빠의 시간을 머금고, 아이가 그렇게 지금처럼 잘 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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