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번째 걸음
미국이란 나라에서 산지 어언 4년, 뉴욕이란 도시에서만 지낸 시간만 해도 3년 반이 넘어가던 무렵 나는 간절하게 매일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2년 차까지만 해도 평생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한때는 뉴욕을 사랑했었지만, (길거리의 강아지들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 내게도 향수병이란 것이 일었다.
타지생활이란 네 글자에 서린 서러움과 외로움을 아는 사람들은 그곳이 어디이든, 내 나라 내 국가만 한 곳이 없다는 걸 잘 알 것이다. 나는 나의 집이, 가족이, 친구들이, 평온함이 그리웠다.
그리고 가장 크게는, 복실 한 나의 반려동물이 간절했다.
평생 외로움이란 단어를 단어로만 알았지 감정으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정도로 독립심이 강하고 혼자 지내길 잘하는 나도 타지생활의 외로움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외로움이란 길이 한번 트이고 나니 더는 그것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뒤늦게서야 돌아보니 깨달은 거지만, 유학생활 끝무렵 나는 심히 외로운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 같다.
매일 카메라를 들고 밖에 나가 다른 이들의 반려동물 촬영을 하며 느꼈던 신기함과 재미는 어느덧 부러움이라는 감정을 지나 '나만 없어 강아지'라는 짜증의 단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무지갯빛 같았던 매일은 회색빛깔로 변해버려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으로 돌아가 사업에 매진하는 바람에 곧바로 반려동물을 입양할 수는 없었지만 나의 반려견 포레와 함께 한국인 지금, 나는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느낀다. 요즘 나는 혼자 행복한 것보다, 둘이 행복함을 나누었을 때 더 만족감이 크다는 걸 포레와 함께하며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래서 결혼해서 둘이 행복한 게 혼자 행복한 것보다 좋지 않겠냐 라는 어른들의 말이 있는 건가 싶다. (반대로 나는 둘이 함께 있어도 외롭다고 하는 부부들이 많으니 차라리 혼자 외로운 게 덜 괴롭지 않나?라고 되묻는 타입이기에 크게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리하여 긴 타지생활 끝에 나는 돌아왔고, 드디어 나의 반려견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동안 카메라 렌즈 너머로 만났던 무수히 많은 반려견들과 반려인들은 내가 한 마리의 강아지를 책임지는데 큰 도움이 되어주었고, 많은 것들 중 가장 중요하게 내게 남은 것은 그들의 산책문화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배변활동과 건강을 위해 귀찮음을 무릅쓰고 산책을 나서려는 그들의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견고한 산책문화는 지금까지도 내 안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반려견들이 여전히 많을 것이다. 옆집의 반려견이 매일 산책을 나서는 동안에도 출근을 한 반려인을 기다리며 하루종일 홀로 지내는 반려견들도 많을 것이다. 법이 바뀌지 않는 한, 반려견들의 산책할 권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반려인들에게 제재를 가할 방법은 없지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반려문화는 반려동물과 인간의 공생을 위한 최선의 길 위에 있지 않다. 비단 뉴욕뿐만 아니라 반려문화 선진국이라 부르는 독일 같은 나라와 비교해 보았을 때도 우리나라의 반려문화는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반려문화들이, 반려인들이 최선이란 말은 아니다. 예외 사례는 언제나 존재하니까.)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 비용을 들이거나 절차적으로 복잡하지 않은 '산책'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반려문화이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1일 1 산책이 당연한 반려문화를 가질 수 있게 되길,
도그워커를 고용해서라도 반려견들의 산책할 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책임감 있는 반려인들이 다수가 되길,
그럴 수 없는 형편이라면 함부로 쉽게 반려동물을 입양하지 못하는 그런 법을 가진 나라가 되길 바란다.
나는 이제 애증의 도시가 된 이곳 뉴욕을 떠났지만 나의 손을 통해, 사진들을 통해, 입을 통해 기록된 그들의 산책문화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이어지는 다음 편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여정도 끝이 난다. 함께 걸어온 그 길 위에 나 홀로 있지 않아 행복했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함께 해주는 반려인들과 반려문화 지킴이들이 늘어났길 진심으로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