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나는 대기에 짙게 깔린 익숙함에 취해 살았다. 매일 오전 6시 40분 알람으로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흐릿한 하루가 시작됐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을 찍는 듯 반복되는 일상. 커피 한 잔으로 겨우 깨어나 시작한 하루는 퇴근 후 소파에 기대앉아 한숨 돌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는 동안 나의 세계는 점점 좁아졌다. 새로운 것보단 익숙한 것으로만 숨어들었다.
뭔가 시작하려 할 때면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말아야 할 핑계가 더 많이 따라붙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자 다짐하지만 ‘운동복은 뭘 살까’ ‘회식과 야근으로 몇 번이나 갈 수 있을까’ ‘비싸니 다른 곳을 알아볼까’ 생각만 하다 몇 번이나 흐지부지됐다. 친구들과 만날 때조차 귀찮단 이유로 동네를 맴돌았다. 이마저 놓아버리면 안 된다는 절박함에 책을 읽고 영화관도 꾸준히 찾았지만 바닥이 드러난 샘은 영 차오르질 않았다.
사표를 내고 비행기에 올랐다. 누군가는 말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했다.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이 되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게 많고 이것저것 시도하길 좋아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무기력한 하루하루가 쌓여 만들어지고 있는 내 인생을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뭔가 하고 싶다고 말하며 그 앞에 늘 ‘언젠가’라는 단서를 붙이기만 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그 꼬리표를 떼기 위해서라도 떠나야 했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그것도 내가 외국으로 나가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일본에 그대로 있다가는 일상생활에 얽매여서 그냥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하자면 정말로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그런 생활은 일본에서는 불가능할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먼 북소리> 머리말 중, 무라카미 하루키
숨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야 숨을 쉴 수 있었다. 평소처럼 하면 된다. 의식하지 말자. 스스로를 계속 다독였다. 10kg 공기통과 고무로 연결된 호흡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시간. 긴장감에 숨을 빠르게 쉬어도, 당황해 호흡을 멈춰도 안 된다. 숨을 참을 경우 폐포가 터질 수 있고, 수면으로 급상승할 경우 감압병 위험이 생긴다. 필기시험을 준비하며 책에서 봤던 최악의 상황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럴 때마다 생명줄 마냥 부력조절기(BCD)에 달린 인플레이터(공기를 넣고 빼는 부분)를 한 번씩 꼭 쥐었다.
바닷속 세상과의 첫 만남이었다.
버킷리스트에 있는 다이빙 자격증을 따러 먼 길을 달려 다합에 왔다. 휴양지에서 다이빙을 해봤다는 지인들 얘길 들으며 그간 다이빙을 만만하게 봤다. 상상 속 나는 능숙한 다이버였다. 수영은 못하지만 남들이 쉽게 했다고 하니 나 역시 여유롭게 새로운 세계를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현실 속 나는 입수조차 망설이는 초짜 다이버였다. 다이빙 포인트가 가까이 있는 다합은 걸어 들어가 입수할 수 있어 훨씬 수월한 편에 속했지만 내겐 그렇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지도 배에서 머리부터 거꾸로 입수하는 것도 아닌데 머리를 물속에 담가야 한다는 사실만으로 두려움이 밀려왔다.
입수는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돌아갈 것인가. 결단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다이빙 선생님이 먼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면 나도 “아 윌 비 백(I’ll be back)”을 외치는 터미네이터처럼 인플레이터를 든 왼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숨을 고르고 BCD 버튼을 눌러 공기를 빼면 비로소 나도 서서히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속의 나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게 서툴렀다. 물속 걸음마부터 차근차근 익혀야 했다. 먼저 몸이 수면과 수평이 되도록 엎드린다. 발을 찰 때는 엉덩이에 닿는다는 느낌으로 위아래로 움직인다. 지상에서 익힌 것들을 되새김질하며 앞서 가는 선생님을 따라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배운 대로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꾸만 뒤처졌다. 1m쯤 이동한 줄 알았는데 실제는 20㎝도 앞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선생님은 제대로 누우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안정감 있게 움직이기 위해선 중성부력 유지가 중요했다. 바닥, 산호에 닿거나 갑자기 수면으로 솟아오르는 일이 없도록 수압 변화에 따라 공기량을 조절하는 것이 필수였다. 선생님 수신호에 따라 공기를 조절하는데도 나는 자꾸만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끝도 없이 바닥으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한 번은 당황해 수신호와 반대로 움직여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퍼런 구멍 속으로 한없이 내려가기도 했다. 순간 세상과 영영 이별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한 번씩 평온함이 찾아왔다.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호흡이 자연스러워졌다. 생명줄처럼 붙들고 있던 인플레이터를 놓고, 이퀄라이징을 위해 코를 꼭 쥐고 있던 오른손에도 자유를 줄 여유가 생겼다. 그제야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코앞에서 지나가는 물고기 떼, 니모를 닮은 이름 모를 물고기, 육지에선 상상하지 못했던 해저지형, 살아있는 산호, 숨을 쉴 때마다 뽀글뽀글 올라오던 공기방울, 햇빛이 닿지 않는 바다의 빛깔, 수면에 닿는 햇빛의 일렁임, 내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의 발놀림 같은 것들. 그리고 내 숨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공간의 고요함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만 상승하자는 선생님의 수신호에 매번 안도하면서 또다시 ‘아 윌 비 백’을 외치며 이 세계에 발을 들였던 것은.
한국을 떠나 ‘일상의 중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 와서야 새로운 것을 할 힘이 생겼다. 매번 바뀌는 낯선 공기는 내게 마법을 걸어 주위를 천천히 들여다보게, 이것저것 궁금해져 자꾸만 물어보게 했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야 할 이유보다 해야만 하는 이유가 더 많아졌다. 가는 길이 복잡하고 오래 걸려도 한 번쯤 가보고 싶으니 커피농장과 카카오 농장에 들렀다. 다이버의 천국으로 불리는 이집트 다합에서 블루홀을 앞에 두고 물이 무섭다고 뒷걸음질 칠 수 없었다. 마음을 빼앗긴 사진 속 풍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12시간 버스를 타는 것도, 산에 오르는 것도 여행 중엔 당연했다.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1년 장기여행은 내게 무수한 ‘처음’을 주었다.
-해외에서 혼자 살아보았다 (in 더블린)
-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했다 (in 다합)
-이른 새벽 겨울 산에 올랐다 (in 엘 찰텐)
-26시간 버스를 탔다 (from 리우데자네이루 to 이과수)
-길을 지나다 초상화 모델이 되었다 (in 세비야)
-해외에서 대통령 선거를 했다 (in 부다페스트)
-사막에서 별똥별을 보았다 (in 메르주가)
-빨간 커피콩을 땄다 (in 살렌토)
-고양이와 강아지를 만질 수 있게 되었다
-공항 노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