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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nsee Oct 20. 2023

치매어머니와 동행 22

가스라이팅 

제가 힘든 것 중 하나가 어머니의 못 말리는 전기 절약 습관입니다.

외출하실 때는 콘센트에 연결된 모든 플러그를 다 뽑으십니다.

텔레비전도, 전자레인지도, 전기담요도, 핸드폰 충전기도….     

그래서 어머니 댁 벽에 있는 모든 콘센트는 성한 것이 없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꽂았다 뺏다를 반복하시니까요.

그나마 치매가 오기 전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다릅니다.     

아침에 전화를 드렸더니 무언가 얘기를 할 것이 있으신 것처럼 머뭇거리시기에 여쭤봤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그러자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십니다.

"글쎄 텔레비전이 갑자기 안 나오는구나."

노인들에게 텔레비전의 존재는 아마 자식 못지않을 겁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주는 아주 소중한 물건이죠.

어지간하면 저보고 집으로 오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 어머니이지만, 텔레비전 고장만은 견딜 수가 없으셨나 봅니다.     

저녁 퇴근길에 어머니 댁으로 향합니다.

집에 들어서서 리모컨을 들고 눌러 보니 어머니가 얘기하신 대로 역시 화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리모컨의 건전지를 새것으로 갈아보아도 증상은 여전하였죠.     

가까이 다가가 여기저기 살피다가 전원 플러그가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벽에 있는 콘센트에 잘 꽂은 후 다시 리모컨을 눌러보았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텔레비전의 화면이 켜졌습니다.

어머니는 기쁜 얼굴로 물으십니다.

"어디가 고장이었니?"

저는 사실대로 얘기를 드립니다.

"어머니, 벽에 전기를 꽂아야 텔레비전이 나오죠. 이젠 어디 가실 때 전깃줄을 빼지 말고 가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무안한 듯 웃으며 한마디 하십니다.

"계속 꽂아놓으면 전기요금이 많이 나온다고 하던데…."

"요즘 나오는 가전제품은 그렇지 않아요."

저는 잘 모르지만, 어머니께 거짓말을 합니다. 그래야 어머니 습관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나 저의 기대와는 달리 그 후로도 어머니의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저녁에 춥다고 하셔서 가보면 전기담요의 전원이 빠져 있었던 적도 있고 텔레비전은 수시로 화면이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어머니는 오랜 습관은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가스레인지의 가스는 한 번도 잊지 않고 잠그시며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오시면 신발을 돌려서 가지런히 놓아두십니다.

그리고 전기 플러그는 하나도 남김없이 빼고 나가시죠. 아, 냉장고는 빼고요.

어떤 때는 집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확인하시는 때도 많습니다.     

어머니가 젊으셨을 때부터 텔레비전에 인상 좋은 아나운서가 나와 외출할 때는 콘센트에 꽂혀있는 플러그를 꼭 빼고 나가라고 귀가 닳도록 얘기했는데, 아마 수천 번도 더 들으셨을 그 이야기를 잊지 못하시는 모양입니다.

아마 이런 것도 가스라이팅의 일종이 아닐까요?

어머니 세대인 분들께 애국심은 자식 사랑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었고, 낭비는 죄악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머니는 마치 당신이 죽을 때까지 꼭 지켜야 할 사명과 책임이라고 믿으시며 오늘도 외출할 때마다 전깃줄을 뺐는지 확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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