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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Mar 30. 2023

기꺼이 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싶다.

타인 앞에서 언제 눈물 흘려보셨나요?

잘 운다.

얼마나 잘 울고 있냐면, 울려고 하기만 한다면 매일 울 수 있다.

우울증이냐고? 아니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무엇보다도 희망차게 배우를 향한 꿈을 꾸고 정진하고 있다. 지나가다 조그맣게 맺혀있는 꽃봉오리 하나에도 웃고 기뻐한다.

그렇다면 조울증 아니냐고? 그냥 눈물이 많다. 웃음도 많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충분히 즐기는 편이다.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어떤 자극들을 통째로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일이 재미있다. 어떻게보면 우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다. 내게는 밥 먹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는 건 외부로부터의 어떤 현상을 마음 한가득 받아들인다면 쉽게 나타나는 반응이다.

지나가다 아기가 우는 것만 들어도 바로 눈물을 흘릴 수 있는데, 친구들의 힘든 이야기를 들을 때나 드라마 캐릭터의 처한 상황을 볼 때나, 심지어 클래식 곡만 듣고 있어도 그 흐름에 따라 눈물이 난다.

문제는 타인과 함께 있을 때는 눈물을 스스로 차단하는 습관이 있다는 점이다. 혼자 있을 때는 어떤 감정, 감각이 생생해서 스스로의 일이나 감정에도 눈물이 나지만, 타인 앞에서는 내 이야기를 눈물로 드러내지 못 한다.



친구들 앞에서 수없이 울어봤지만, 그건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이야기다. 나의 가슴 속 무언가에 대한, 나의 이야기로 시작한 무언가를 눈물로 표출하는 게 어렵다. 아마도 혼란스러운 현 상황의 날것을 그대로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마음이다. 나의 날 것 그대로가 세상에 드러나는게 두려운 마음일까.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사회적으로 용인이 되지 못 할 게 두려운 걸까. 스스로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의 날 것 그대로가 조금은 요상해 보일지라도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을.



연기를 할 때에도 이 부분이 고민이 된다. 캐릭터가 처한 상황과 대사를 있는 그대로 공감하고 있지만, 그 캐릭터를 ‘나'라는 사람으로 치환하여 표현해 낼 때, 본래의 ‘나'의 습성이 강하게 작용한다. 처절한 고통을 표현하는데 항상 담담하게 연기하게 된다. 고통을 기어코 참아내고 버티려고 한다. 절대 눈물이 터지지 않는다.



가까스로 눈물이 고여있을 때도 이상하게도 스스로 눈물을 간신히 잡고 절대로 놓지 않는 무의식이 느껴진다. 절대로 이 혼란스러움을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을거야! 라는 고집. 어쩌면 타인에게 기대지 못 하는 연약한 어린 아이의 고집이다. 누군가가 나의 침묵하는 아픔을 기어코 버티고 있다는 걸 알아만 준다면, 나는 타인에게 내 고통을 기꺼이 드러내면서 기댈 수 있게 될까. 내가 간절히 바라는 건 타인의 먼저 내민 손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타인의 어려움의 정도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표현해 내지 못한 그림자의 크기를 더 깊게 가늠해 보곤 한다. 그리고 애정이 있다면, 한번쯤 손을 내밀어 보기도 한다. “내게 기대도 돼.”라고.



실상은 말하거나 표현해 내지 못 한다면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겪고 있는 어려움을 잘 표현하지 않고 입 닫고 있는 나를 잘 아는 어느 친구가 내게 선물한 시가 생각난다.



===


그러나 너는 등을 보인 채 창문 위에 뜻 모를 글자만 쓴다. 당연히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입김이라도 새어나오는 겨울이라면 의도한 대로 너는 네 존재의 고독을 타인에게 들킬 수도 있었을텐데.


- 이제니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중에서

                              

===



분명히 나의 있는 그대로의 것을 세상에 내놓지 못 하는건, 세상이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고 나의 있는 그대로가 받아들여진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결국 해결할 수 있는 건 내가 누군가의 있는 그대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나도 내 것을 세상에 기꺼이 보여줄 수 있게 될까. 언제까지고 예정되지 않은 타인의 먼저 내민 손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한편으로는 내가 기꺼이 꺼내보인 나의 날 것을, 타인이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야 할까. 그것보다도 나의 날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꺼내어 보일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나는 스스로의 내가 너무 아름다운데, 스스로가 힘든 게 너무 안쓰럽고, 이게 설령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니까 그냥 세상에 내보이는 것. 나를 세상에 떨치고 나의 소리와 기운을 내보내는 것. 그런 울림. 



나는 나의 날것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사랑할 용기가 필요한 걸까.

언젠가 나의 속내를 자유롭게 소리치며 내보일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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